교회이야기/해외교회이야기

[스크랩] 러셀의 교회성장

행복충전소 2008. 11. 15. 08:42

러셀의 마인드 해부

밥 러셀(Bob Russell) 목사는 사우스이스트 크리스천 교회<Southeast Christian Church>의 담임목사로 1962년 50명이 출석하는 교회를 2003년 23,000명의 멤버십을 가진 교회로 성장시킨 탁월한 목사입니다. 특히 기존교회에 부임하여 끈질긴 변화를 통해 새롭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목회 원리를 적용하되 지금은 매년 수많은 세계의 교회 리더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는 목사로서의 의식이나 교회 성장에 대한 이론들이 성경적이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된 사역을 하는 탁월한 지도자입니다. 러셀의 근본적인 목회에 대한 철학과 신앙을 알면 SCC가 거대하게 성장하고 건강한 교회가 된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특히 그의 강의에서 제시한 10가지 교회 원리는 ‘When God builds a church’라는 책에 소개되기도 했지만, 그의 교회 성장에 대한 원리는 오늘의 목사들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먼저 그는 교회성장에 대한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은 원리를 적용하기 전에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뜻에 더욱 가까이 가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간혹 목사들이 놓치기 쉬운 것이 교회 성장 원리나 목회 비결에 관심을 두다가 자신의 모습이나 정신(spirit), 정체성(identity)은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에 대한 러셀의 5가지 정신

첫째, 러셀은 교회 성장은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 라고 했습니다.

출석을 늘리고 헌금을 많이 내게 하고 교회의 건물을 넓히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며 얼마나 효과를 거두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닮고 있는가? 그리고 리더가 목회를 정말 그런 모습으로 하고 있는가에 의해서 성장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 성장이 단순히 교인수 늘리기에 있지 않으며 교인수가 늘었다고 교회가 성장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 성장을 정의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근본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둘째, 러셀은 교회성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다 했습니다.

러셀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6:14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과 고린도후서 11:10의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사실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는 SCC의 성장은 하나님이 일하셨음이라고 자랑했고 어느 해 일 년에 무려 2400명의 새 신자를 얻게 된 것도 하나님이 특별하게 충만함을 부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교회 성장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러셀은 대형교회 (mega churches)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버렸습니다.

그는 양 도둑질(stealing sheep)을 통해서 교회를 성장시켜 무조건 대형교회로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교인의 50%는 언제나 다른 교회에 한 번도 나가지 않은 새로운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는 SCC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교회가 되는데 집중력을 가졌습니다. 최고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성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며 구원받는 사람들이 많은 회심 성장(conversion growth)으로 이루어져야지 사람들만을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기는 이동 성장(transfer growth)을 선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메가처치에서 메타처치(meta church)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은 교회를 억지로 크게 만들기 위해 수단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넷째, 러셀은 (Why)그리고 어떻게 (How)교회가 성장했는지 잘 알았습니다.

그는 30여 년 동안 SCC의 성장의 기적을 요한복음 3:8에 기초를 두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그는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들과 다른 점은 하나님이 부어주신 영적인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초청을 환영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는 목회에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바람을 불게 하는 교회가 되기 위한 목회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회에 집중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프린지(fringe 이탈자)가 되지 않기 위해 열정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교회 성장을 주도하는 목사는 교회 성장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러셀은 자신의 이미지 (imagination)에 의해서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러셀은 죽은 교회(dead church)와 살아있는 교회(alive church)에 대한 정의를 정확하게 내리고 SCC가 어떻게 하는 것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는가를 파악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이미지나 리더와 회중의 이미지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용하심의 범위가 결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지만 죽은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죽은 교회와 살아있는 교회의 비교는 다음과 같습니다.

Dead church

Alive church

1. 비전이 약하다(vision)

2. 변화의 소원이 없다(desire)

3. 회중이 함께 하지 않는다(get along)

4. 하나님을 예배 하지 않는다(worship)

5. 관대한 섬김이 없다(give)

6. 전도에 전혀 관심이 없다(evangelism)

7. 탁월한 기도 교육 훈련이 없다(excellence)

8.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다(truth)

1. 하나님을 예배(worship)

2. 서로 사랑(loving)

3. 승리하는 교회(winning)

4. 거대한 꿈(dream)

5. 성장하는 교회(growth)

 

 

 

러셀은 교회의 수적인 성장에만 잡혀있는 목사가 아니라 그는 자신과 더불어 모든 성도들이 교회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what a church can be?)에 관심을 갖도록 했고 교회에 대한 꿈을 심어주어 그들의 믿음과 시야를 넓히는데 희망을 갖고 목회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설교를 잘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는 목사가 되기 위해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서 원칙에 의한 바른 목회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교회 성장은 우연한 사건이 어느 날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결과도 아닙니다. 교회 성장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한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그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이루기 위해 성숙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목적 있게 살 때 드러나는 축복입니다.

1. 진리 - Truth

 

SCC는 1998년 새로운 교회를 건축하면서 모든 스텝들과 성도들에게 교회의 바닥과 카페트에 “ 기적의 기념표식 ”(magic markers)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쓰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러셀 목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성도들에게 절대적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붙들도록 하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살도록 하는 거룩한 욕심을 표현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 3가지를 강조했습니다.

1) 진리를 믿으라 (Believe the truth)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리를 믿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진리란 죄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변화되게 하는 것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씻김을 받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로마서 3:23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돌아오도록 진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준을 만들어 놓으셨고 그 기준에 맞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바른 것과 틀린 것에 대한 분명한 진리의 기준을 교회는 제시해야 합니다. 죄를 덮어놓은 상태에서 교인으로만 남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은 진리의 기준이었습니다. 반드시 십계명을 실천해야만 그들은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새로운 진리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사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로마서 3:15-18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

죄의 길을 가는데 빠르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평강의 길을 가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요한1서 2:24-25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교회는 세상 사람들을 약속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 운동을 일으키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디모데후서 4:2)고 부탁한 것입니다.

교회는 경책하며 경계하여 권해야 할 것이 진리입니다. 생명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에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영감의 말씀인 성경의 본질을 가르치는 것에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가르치기 힘든 일이지만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도록 사람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7:14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생명의 길을 찾게 해 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생명을 다루고 생명에 대해서 가르치고 생명을 전하는 곳입니다.

① 교회는 진리와 타협 (compromise)하려는 유혹을 저항 해야 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이나 설교들이 교회 안에서 활동하지 못하도록 진리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진리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4:8에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바르고 정확한 진리를 선포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만일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는 장소로 타락을 하게 되면 교회의 권위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로 세워지고 끊임없이 순수한 하나님의 진리가 교회 안에서 활동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절대 확신과 신뢰의 믿음이 교회를 지탱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자유주의 사고는 교회를 파괴시킵니다. 진리를 전하는 척하는 모습을 갖게 되면 교회는 잘못된 위치에 세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헌신하는 목사와 스텝들과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② 교회는 진리의 방해 (opposition)에 직면하게 될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요한복음15:20).

이 세상의 흐름 가운데 포스트모던 마인드(Post modern mind)는 사람들에게 관용(toleration)을 선호하도록 했습니다. 억압과 단일 개념의 의식을 주입시키면 현대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거절합니다. 교회도 이런 포스트모던 마인드가 침입하여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해야 하지만 사람들의 요구는 보다 편한 강연이나 도덕적인 내용들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only way”를 말씀하십니다. 다른 길이 아닌 오직 한길입니다. 교회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에 의한 결심을 하도록 교회는 사람들을 진리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진리를 선포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축복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5:11-12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진리를 선포하면 방해를 받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들이 상을 받고 축복을 누립니다.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이사야 55:11).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진리를 믿도록 하는 일에 교회는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진리가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진리가 사람들을 살립니다. 목사는 진리의 설교를 하고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진리를 믿도록 설교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교회에서 진리를 붙잡기 위한 몸부림을 쉬지 않아야 합니다. 진리를 믿고 진리를 따라가야 바른 성도입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진리를 확신 있게 믿는 교회입니다.


2) 진리를 가르치라 (Teach the truth)

설교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preaching)

많은 교회들이 진리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교의 주제나 중심이 진리이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매주일 빈 마음으로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의 말씀에 배가 고파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에게 배고픔을 해결하도록 먹을 것을 공급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계속해서 배고픔과 목마름과 절망으로 가도록 내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설교자이셨습니다(Jesus was a preacher).

누가복음 4:43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이셨습니다. 세(침)례 요한과 바울, 베드로 역시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설교 핵심은 진리였습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가 설교사역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좋은 설교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설교란 어떤 설교입니까?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설교보다는 사람들에게 소원을 갖게 하는 설교가 좋은 설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고린도전서 9:16-17).

하나님의 말씀(진리)으로 먹이는 것이 좋은 설교입니다. 그리고 목사는 복음을 전하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복음을 확장시키기 위한 설교를 해야 합니다.

교회가 진리를 왜곡하고 사람들의 흥이나 돋우며 들떠있게 유희(frolic)하는 곳으로 이용당한다면 교회의 목적은 희미해지고 사람들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는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우는 교회의 중심인물입니다. 좋은 설교, 도전을 주는 설교, 비전을 제시하는 설교, 희망을 주는 설교보다 더 중요한 설교는 진리의 설교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설교를 하다가 핍박을 받아야 옳은 목사이지 달콤한 설교를 하며 사람의 입맛에 유혹 당하는 설교를 한다면 인기에 도취된 목사일 뿐입니다. 진리가 모든 것을 세우고 변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② 진리의 설교를 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자료보다 성경말씀을 많이 사용해야 합니다.(use a lot of scripture)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디모데후서 4:1-5).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은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전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는 설교는 회중들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말씀 속에서 나와야 하고 많은 말씀들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③ 진리로 가르친다는 것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초 (ground)를 두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장소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변질되게 하여 세상의 것들에게 침식(erode)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는 일이 중요합니다. 성경이 진리라고 가르쳐야 합니다(the Bible is true). 성경 말씀을 기억하도록 해야 합니다(to remember).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to teach).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전해 주어야 합니다(what God's Word says), 성경 말씀의 진리를 이해하게 해야 합니다(understanding of God's truth).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리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창조적이며 효과적으로 사역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 말씀을 기초에 두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하길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되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에베소서 4:14-15).

④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God's grace)로 균형 있게 강한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하는 곳입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진리의 내용을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덮여있는 곳입니다. 교회의 심볼(symbol)은 은혜(grace)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4에서 “진리와 은혜가 충만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또한 은혜 안에 사는 자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용서를 받고 매일 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승리하고 격려하시는 사랑을 받고 있음을 큰 은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균형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영적 전쟁의 승리를 말합니다. 그 영적 전쟁은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입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 은혜란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리만을 가르치도록 해야 합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입니다.

3) 진리를 적용하라 (Apply the truth)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나 교사가 적용을 할 때 그 진리의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매일의 삶 속에 굉장한 능력을 연결해 주는 브리지(bridge) 역할을 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살아있는 믿음과 역동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서 그의 설교를 듣는 자(listener)의 매일의 삶에 성경적 원리를 적용토록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synagogue)에서 성경을 읽어 주실 때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삶에 직접 적용하는 말씀을 했습니다.

① 진리의 말씀을 적용 (apply)하라.

예수님은 성경적인 원리를 삶에 적용하신 분이십니다. 가르치는 자나 설교하는 자에게 중요한 것은 3가지입니다.

첫째는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 하는 것입니다(exposition of text).

둘째는 진리를 예증 하는 것입니다(illustration of truth).

셋째는 삶에 적용 하는 것입니다(application to life).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서투르게 설구워진 상태로 해석을 하고 약간의 설명 정도로 끝내며 그들의 삶에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효과적인 설교는 마음과 정신과 의식과 삶을 변화시키고 더 진리에 붙들려 사는 영적이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 가운데 말씀과의 접촉을 시도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Between Tow Worlds’라는 책에서 ‘성경의 영적 세계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두 세계에 대해서 교회는 진리로 분별을 갖고 살도록 진리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자신에게 적용될 수 있는가? 또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적용될 수 있도록 가르치는가를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용이 없는 말씀은 물이 없는 우물과 같습니다. 항상 목마르는 것은 말씀이 그의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적용하십시오. 그것은 실천입니다.

② 말씀이 월요일 (Monday)에 적용되게 하라.

적용하라는 것은 실천을 의미합니다. 목사는 설교를 할 때 실천적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실천적 말씀이란 평일세계인 월요일에 적용되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말씀을 일요일(Sunday) 적용을 강조하지 월요일(Monday) 적용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는 것같이 설교합니다. 설교는 매일 매일의 라이프 스타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며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들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말씀을 거절하거나 부정하며 살도록 내버려 둔 다면 설교는 아무런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일요일용 말씀만을 듣게 만드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③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간결한 실례 (brief examples)를 제시하라.

성도들에게 말씀을 적용하도록 가르칠 때 하루에 한 구절이라도 묵상하고 실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온갖 문제들이 쌓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질투를 합니다. 이 질투하는 내용들은 차, 집, 표현, 아이들, 친구, 재능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질투하지 않고 사는 생활로 바꿀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브리지(bridge)를 견고하게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을 경작하고 본이 되는 삶을 살도록 매일 말씀으로 사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성경에서 질투에 대해 말씀하신 구절들을 찾게 하고 묵상하며 자신을 버리는 일과 주님의 영적 성품과 인격으로 다듬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아는 만큼 생활에 적용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 생활에 실패하지 않도록 하나하나 진리를 붙잡도록 해야 합니다.

④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깊이 생각 하게 하라.

성경의 말씀들은 모든 사람에게 다른 이야기입니다. 성도들이 똑같은 본문 내용의 설교를 들어도 그 말씀이 사람들마다 다르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각자에게 다르게 일하십니다. 성경의 사건이나 인물들의 활동은 하나님과 진리를 배우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만일 성경에서 사랑이 주제라면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것이구나 라고 깨닫고 교회나 사회나 가정에서 서로가 사랑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삶을 살도록 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의 말씀은 어느 시대 어느 누구에게나 인생의 목적이나 삶의 방향을 정해주기 때문에 성경을 보든지 설교를 듣든지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7:3에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는 말씀처럼

죄에 대해서 용서하고 오래 참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도록 생각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무조건 비방하고 그를 더욱 비참함으로 끌고 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생활 속에서 말씀이 각 개인의 삶에 적용되도록 하는 이해가 중요합니다. 성경을 많이 배우는 것의 목적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자신에게 적용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실천하십시오.

⑤ 승리하도록 실천의 계단 (Practical step)을 오르게 하라.

사람들은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거나 분석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서두릅니다. 기억할 것은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의 발단은 어디에서부터인지, 무엇 때문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한 후 문제를 해결하는 정복자(conqueror)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실천의 계단(practical step)으로 오르는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계단에 오르는 신앙생활의 예를 보면 이렇습니다.

▶육욕을 갖지 말라(Don't lust). - 만일 죄를 짓게 하는 눈이라면 빼버려라.

▶걱정하지 말라(Don't worry). - 대신에 하나님의 공급과 우선순위를 유지하라.

▶보는 것을 구하지 말라(Don't pray to be seen). - 하나님 아버지를 구하라.

말씀의 정복자가 되려면 먼저 그 문제의 정확한 내용파악을 하고 그 다음의 단계인 하나님이 예비하신 대답을 찾는 것입니다. 육욕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해결은 죄를 짓는 것을 자르는 것입니다. 걱정도 누구나 합니다. 그것에 대한 해결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은 매일 발전하는 것이고 라이프 스타일이 한 단계 한 단계 향상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훈련을 받는 이유가 적용을 통해서 한 계단씩 오르는 생활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이 저 높은 곳까지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의 유아기를 벗고 말씀의 성년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하고, 묵상하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 성장이란 진리의 부르심에 대한 헌신입니다. 교회는 설교자들과 가르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설교나 가르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게 만들고 그 말씀을 매일의 삶에서 실천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 교회를 자라게 하십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한 교회를 만드는 것이 첫째입니다. 또한 교회는 성도들이 진리로 승리하도록 만드는 곳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고 마지막 주의 나라에 서기까지 승리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는 교회나 성도는 성장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이 변화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로 교회와 성도를 세우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

2. 예배 - Worship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에게 첫 번째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시편 95:6-7). 예배란 몇 곡의 찬양을 부르는 것, 의식을 거행하는 것, 불후의 명 설교를 하는 것 이상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그 분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과 창조자이신 그 분을 경배하는 것을 예배를 통하여 응답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예로움에 대한 찬양입니다.

월리엄 템플 (William Temple)은 말하길 “예배란 하나님께 우리들의 모든 본성을 복종케 하는 것이다”(Worship is the submission of all our nature to God)라고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1시간 예배하는 것은 일주일의 나머지 167시간에 비하면 적은 시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주일의 공적 예배(corporate worship)를 바르게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복종하는 신앙생활이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아모스 5:21-24).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의식이나 습관적인 행동으로서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예배에 나온다면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바울은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1).

예배란 단순히 일주일마다 한 시간 동안 무엇을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예배란 “예배자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길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주일에 모든 지체들이 함께 하며 드리는 예배란 작은 빛들이 모여져 하나의 큰 빛(one giant light)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마다 예배자들이 교회로 모이는 것은 작은 빛들이 큰 빛을 이루기 위해 돌아오는 모습입니다.

교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대 예배나 열린 예배를 위하여 현대 음악이나 뮤지컬, 드라마, 스타일, 악기, 조명 등을 준비하고 관심을 갖는 것 이상으로 우리 교회의 예배는 진실로 건강한 예배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가를 최우선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에서 다음의 3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만 합니다.

첫째, 우리들의 예배는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둘째, 예배자들은 영감과 향상과 변화가 있는가?

셋째, 방문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에 충만한 예배인가?

1) 예배의 원리는 무엇인가?

                                             

   (We gather for worship to glorify God)

예배의 첫째 목적은 의자에 앉아서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마치 예배를 공연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노래는 좋았어? 연극은 괜찮았어? 오늘 설교는 좋았지? 대표기도는 잘했어? 예배를 마치 군중 앞에서 연기를 하는 모습으로 착각을 하여 잘못 평가합니다. 예배의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시편 29:2에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역대상 29:11-13에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라고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14:7에는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예배인도자는 연기자(Performer)가 아니라 격려자(prompter)이어야 합니다. 오히려 회중들이 연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할 때 얼마나 하나님을 기뻐하시는지 알고 계십니다. 성경의 예배는 2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예배는 두려움의 감각(a sense of awe)과 기쁨의 감각(a sense of joy)입니다.

첫째.                                 (a sense of awe)

처음 하나님 앞에 나을 때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분이며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왕 중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이사야 6:1-5).

하나님의 임재는 사람들을 두렵게 합니다. 예배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예배자로서 준비되지 않은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행동입니다. 사람은 예배하기 위하여 전지하신 하나님과 전능하신 하나님(the omniscience and omnipotence of God) 앞에 나올 때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편 8:3-9).

둘째.                                          (a sense of joy)

하나님은 예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속에 기쁨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두려움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2:46-47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초대교회는 기쁨을 가지고 성도 모두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교회였습니다. 시편기자는 고백했습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 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 찌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시편 100:1-5).

하나님은 인간의 아픔과 상처들을 치료하시며 사랑하시며 돌보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배자는 그 분 앞에 기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며 그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으로 충만해 지는 것이지 우리의 소원을 받아내기 위한 종교적 행위가 아닙니다. 세상 종교와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가치를 높이는 일입니다 (worship-worthy + ship). 그러므로 주일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지체들이 기쁨으로 모여 하나 됨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서로 격려하며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힘을 다하는 교회로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기쁨으로 예배당에 나오는 예배자들이 있는 교회가 기쁨의 교회입니다.

                                                                          (Genuine worship inspires the worshiper)

예배의 주목적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적 예배 때 예배자들을 향상시키고 격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말하길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편 122:1)라고 한 것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집(God's house)인 교회로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기쁨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감동이 일어나고 권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배로부터 유익을 얻습니다. 예배자인 각 개인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월리엄 핸드릭스(William Hendricks)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예배에서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는 지루함(boring)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배의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성도들이 함께 예배드리는 것에 대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만나는데 약간의 도움을 줄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예배의 유익이란 하나님의 임재(the presence of God)를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란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매혹적인 드라마(a captivating drama),감동적인 독창(an impressive soloist), 적절한 메시지(a relevant message)보다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러셀 목사는 말하길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은 그 곳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한 기대 때문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예배드리기 위하여 매주일 교회를 찾는 성도들에게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도록 영감 넘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에 온 성도들이 힘을 모으고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서로에게 격려하며 예배의 준비와 참석을 향상시켜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브리서 10:24-25).

어느 계절이든지, 내가 교회에 가고 싶던지 그렇지 않던지, 설교가 은혜가 되든지 그렇지 않든지 성도들이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내가 예배를 통하여 무엇을 발견하기 원하는가? 그렇게 한다면 현재의 예배보다 더 좋은 예배로의 향상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Four legitimate expectations from worship)

성도들이 예배에 참석할 때 바른 기대(expectation)를 가져야 합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보좌’(throne room)에 계신 하나님을 체험했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예배 체험을 위하여 예배자들은 바른 기대를 갖고 예배를 드리는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배자들은 어떠한 기대를 가져야 하는가?

첫째.                                                                (sense).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먼저 교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으로 기대해야 합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이사야 6:1)라는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갔을 때 이미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예배자들이 깊게 기대해야 할 것은 우리가 예배드릴 때 거룩하시고 권능과 위엄과 기쁨의 하나님이 우리들 가운데 계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conviction).

예배를 드릴 때 자신의 죄악을 해결하는 확신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 이 죄입니다. 죄의 해결이 없이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배는 내려놓아야 할 것과 드려야 할 것을 구별시키는 것입니다. 죄를 마음에 담고 예배한 다면 하나님과의 통로가 막혀있는 것입니다. 죄를 씻는 예배를 드리십시오. 이사야 6:5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선지자 이사야는 고백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백하길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했습니다(디모데전서 1:15). 선지자 이사야나 바울의 고백은 자신들 스스로 순결하신 하나님 앞에 비밀을 폭로하는 표적(telltale sign)을 보여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죄에 대한 밀고자였습니다. 바른 예배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는 예배입니다. 거짓된 모습이나 죄를 숨기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정결함에 있습니다. 자신의 죄의 상태를 알도록 만드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죄를 쏟아 놓고 용서를 받는 기대를 가져야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더 깊게 하기 위해서 죄를 씻는 예배가 먼저 필요합니다.

셋째.                                                     (reminder).

예배를 드릴 때 죄의 씻음에 대한 응답과 죄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하더라”(이사야6:6-7).

바른 예배는 예배자들로 하여금 죄로부터 돌아서도록 동기부여를 해주는 예배입니다. 단순히 그들을 그곳에 서있게 만드는 것은 잘못된 예배입니다. 요한1서 1:7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the blood of Jesus.... purifies us from the sin)”라는 예배는 깨끗하게 하시는 은혜를 기억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예배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원기를 제공하여 주는데 그 기쁨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넷째.                                                           (inspiration).

예배를 드릴 때 영적인 감동으로 응답하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예배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렇게 응답을 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8). 예배자들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축복해 주신 것에 대한 최고의 고백과 최고의 언어는 바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입니다. 러셀 목사는 교회의 주보에 이렇게 썼습니다.

“Enter to Worship-Depart to Serve” “                                     

신앙생활은 예배로 들어가는 삶이고 예배에서 나올 때에는 섬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배를 드린 후에 불편하고 예배에 대하여 문제를 삼고 실망을 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기대를 갖고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사람의 변화에 있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받은 은혜들이 섬김으로 나타나는 성숙된 표현이 있어야 합니다.

                                                            

  (Evangelism is a by-product of authentic worship)

예루살렘 교회의 예배는 이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사도행전 2:47).

바른 예배는 전도가 있는 예배입니다. 예배 가운데 성령의 일하심은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로 불신자들, 구도자들을 데리고 가도록 재촉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authentic worship)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예배입니다. 예배의 가장 능력 있는 도구는 배고픔에 굶주린 사람, 영혼에 상처를 지닌 사람, 영적 기점이 무너진 사람, 기쁨이 사라진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속에서 체험한 먼저 부름 받은 사람들이 예배에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을 전도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예배입니다.

2) 어떻게 예배의 분위기를 창조할 수 있는가?

  (How to create an atmosphere of worship)

                                             

  (Choose the right worship leader)

예배인도자는 음악적인 재능이나 실력보다 개인의 성품을 보고 선택해야 합니다. 예배인도자는 두 가지가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데 주님을 닮은 개인적인 성품과 예배를 인도할 수 있는 능력(talent)입니다. 만일 워십 리더가 겸손하지 않다든지 관대한 마음과 섬김의 자세가 아니라면 그는 예배자들을 따라하게 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 성품이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말하기도 합니다. 예배인도자는 말씀과 기도 생활을 충실히 함으로 영적으로 충만한 자신을 가꾸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가 예배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영적인 흐름을 감지하며 하나님을 놓이도록 예배를 이끄는 상태가 되면 하나님의 임재를 모든 예배자들이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예배인도자가 영성이나 인격이 잘못되어 있고 오직 재능이나 실력으로만 예배를 이끌려 한다면 하나님은 그 예배와 예배인도자, 예배자들을 거절하게 됩니다. 교회의 예배 인도자(찬양인도자와 다름)는 훈련을 통하여 세워야 합니다. 예배인도자는 악기, 의상, 말하는 솜씨, 노래 실력도 중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예배인도자가 갖추고 있어야 할 인격과 영성입니다. 워십 리더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주일에 한 시간 예배를 인도하기 위한 사람이 아니라 그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예배를 드리려면 거룩한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힘찬 예배를 드리려면 충만한 예배인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이끄는 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예배인도자 선택에 신중해야 합니다.

                                             

(Be prepared and intentional with every part of the service)

하나님은 예배를 위하여 최고의 연기를 원하십니다. 예배의 기획, 리허설, 계획, 집중력을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당신은 예배를 준비할 때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예배 계획 가운데 성령께서 얼마나 인도하고 있는지? 성령께서 예배를 준비할 때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아시기에 우리들의 계획을 인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를 준비하도록 능력을 주시며 하나님을 믿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예배가 더욱 영감이 넘치게 하려면 그런 믿음으로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로막았다면(interrupted) 예배는 거북하게(stilted)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철저하게 준비하면 할수록 예배는 더 영적인 힘을 불어 넣어주고 영적 힘이 공급됩니다.

❉ 예배분위기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6가지 제안

첫째.                                                               

   (Choose the right worship songs)

찬양의 핵심적 선택은 관계에 있습니다. 또한 찬양은 반드시 서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교리적으로도 만족을 주어야 합니다. 왜 바른 찬양 선택이 중요한 것인가? 찬양은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Sally Morgenthaler). 그것은 아래와 같은 4가지 특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PASS 선택법

Personal                

-사람들의 존재와 삶과 관계되는 것.

Attractive                

-사람들을 끌어당기며 주목하게 하는 것.

Straightforward                

-찬양에서 사람들이 벗어날 수 없도록 묶어(latch)두는 것.

Substantive                

-성경적 메시지가 믿음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

둘째,               (reverence) 과               (joy)을 균형있게 유지해야 합니다.

모든 예배는 기쁨(joy)과 존경(reverence)의 순간을 포함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은 빠른 찬양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경우는 느린 찬양도 있어야 합니다. 성만찬을 하면서 빠른 현대 음악만을 고집한다면 묵상할 기회를 빼앗게 됩니다. 손을 드는 것도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는 한 쪽으로만 치우치게 될 때 예배의 불균형으로 불안해지고 위험해 지는 것입니다. 복음송만을 고집한다든지 찬송가만을 고집하는 불균형적 찬양 선택에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현대 예배의 경우는 영감 있는 찬양을 통한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찬양의 다양함을 교회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배가 장년만이 아니라 청년들도 신앙표현을 할 수 있도록 민감한 선택이 필요합니다. 열정적인 카리스마가 있는 뜨거운 찬양도 필요하고 교리적인 거룩한 찬양도 필요합니다.

셋째, 예배 시작하기 전에               (practice) 과               (pray)를 해야 합니다.

SCC의 경우 모든 예배팀들은 주말에 예배를 위한 2시간 동안 연습과 리허설을 통해 예배의 전반적인 부분을 점검합니다(음악, 드라마, 코러스, 특별순서,). 그리고 예배 1시간 전 나와 함께 기도로 준비를 합니다. 그들은 악단원, 기술담당, 워십팀, 드라마부, 찬양대 모두가 함께 모여 1시간 동안 리허설 룸(rehearsal room)에서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2곡의 찬양을 부르고 예배에 하나님이 축복하시길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그런 후 오늘 예배에 대해 착실하게 연습을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만 은혜가 임합니다. 충분한 연습과 기도 준비가 예배를 최상으로 만듭니다. 연습과 리허설은 예배의 시간 조절과 함께 보다 질서 있고 정확한 시간 개념을 갖게 합니다. 예배 큐시트(Cue-sheet)는 필수로 준비해야 하고 리허설이나 기도회 때 순서마다 체크하는 자료로도 사용하고 잘 수정된 큐시트는 예배인도자나 설교자에 자신감과 도 움을 주게 됩니다.

넷째,               (begin) 과               (end)를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 시작은 정확한 시간(On time)에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끝나는 시간도 일정한 것이 유익합니다. 보통 SCC의 예배 시간은 70분 정도이며 설교는 30분입니다. 예배의 시간 문화는 그 교회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새신자들에게도 도움을 줍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시간의 의식을 심어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더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 예배의 목적이기에 너무 지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 시간을 늘릴 때도 단계적으로 해야 하고 늘리는 이유가 무엇이며 목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정을 한 후에 시행해야 회중들이 이해를 합니다. 예배자들이 시계를 바라보거나 예배가 오래 끄는 것 같은 느낌을 갖기 시작할 때 예배는 집중력이 떨어져 있다는 사인입니다. 너무 시간 개념이 흐린 예배를 드리지 말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 날의 예배 핵심을 설정하고 일관성 있게 예배를 진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다섯째, 예배로 사람들을                (invite) 하도록 안내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온 정성을 다해 주목하는 예배(full attention), 하나님을 전적으로 집중하는 예배 (totally focus on)를 하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몇 곡의 찬양을 할 것인지, 몇 분의 기도를 할 것인지, 설교를 길게 할 것인지 짧게 할 것인지 준비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찬양의 소개, 신학적인 접근, 침묵 등 지혜롭고 민감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예배의 준비란 예배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주는가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예배 인도자나 모든 예배의 봉사자들 그리고 오늘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의 오직 한 가지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to worship God)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을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초청을 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특히 찬양을 부를 때 예배자들이 보다 쉽게 하나님 앞으로 나 가도록 초청을 하십시오. 수동성이 아닌 능동성으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의 만남(encounter)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섯째, 창조적(creative)           합니다(Predictable).

예배에서 지난 주의 것을 오늘로 그래도 옮겨놓는 것은 죽은 예배입니다(a dead worship). 예배는 창조적이어야 합니다. 변화가 이루어진 찬양과 예배의 순서들, 신선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예배를 봉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변화가 심하다든지 예배자들이 전혀 따를 수 없거나, 할 수 없는 것들이라면 그 예배는 회중들에게 전혀 무의미합니다. 자신에게 항상 질문해야 할 것은 ‘이번 주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영감이 있는 예배가 되기 위하여 우리들이 창조적으로 해야 될 것들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매주 예배가 새롭고 신선하도록 순서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예배는 미래지향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야 역동적입니다. 지난주의 것을 똑같이 반복하는 것은 예배를 기대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매 주일 예배를 새롭게 짜십시오. 창조적인 예배는 영감이 살아있게 되고 하나님의 임재도 강하게 나타납니다.

3) 진정의 예배를 어떻게 드릴 수 있는가?

‘감정을 조작하지 말라!’어떤 목사들은 말하길           (an outstanding worship) 위해서는 ‘3개의 손수건을 준비하게 하라’(a three-hanky). 즉, 3번 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감정에 호소할 때도 있지만 항상 감정적인 것만이 예배의 목적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예배 시간에 우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 주간의 삶을 어떻게 사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말씀한 것같이 산제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롬 12:1). 하나님은 기쁨의 감정을 갖고 사는 것을 원하시지만 순종하는 인생(obedient life)으로 사는 것을 더 원하십니다.

사무엘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마태복음 15:8-9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이 말씀들 속에는 사람들이 예배 때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눈물, 웃음, 동기, 영감 등 그러나 그것들을 체험했다고 해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진정한 회개와 하나님께 돌아서는 동기나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고 위축 된 상태로, 그런 감정적인 행동을 체험하고 있는 것은 그저 감정일 뿐입니다. 진정한 예배의 체험은 바른 응답과 반응에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정을 만들어 내는 행동이 아닙니다.

❉ 감정을 통해서 나타나는 위험한 예배의 방해들

1) 간증은 경건하고 진실하게 해야 합니다. -고백이나 간증할 때

 -authentic, dignified, reverent

2) 설교자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flowery language. King James language. a deep voice. high-church sound

3) 교묘하게 꾸미지 말아야 합니다. -인사할 때.

 -unspiritual. uncomfortable

4) 초청을 길게 끌지 말아야 합니다. -곡 소개나 사람을 소개할 때.

 -inconvinced. coercion


4) 예배의 음악스타일(music style)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가?

음악은 예배를 운반하는 수송수단과 같습니다. 만일 예배에 하나님께 나아감이나 교통함이 없거나 불편하다면 그 예배는 핵심을 잃은 예배일 것입니다. 때문에 찬양의 선택은 예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특히 현대 예배의 장점이 다양한 음악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회중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훨씬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만일 찬양을 선택하는데 모두 현대 찬양(contemporary songs)만을 선택한다든지 아니면 모두 찬송가를 선택한다면 정말 예배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음악의 스타일은 예배에 중요합니다. 예배 문화를 만드는 것은 그 교회의 핵심입니다. 러셀이 섬기는 교회는 통합적(blended) 찬양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 첫째, 왜 현대 음악으로 찬양해야 하는가?

① 하나님을            (variety)            (freshness) 경배하기 위해서

② 하나님은            (a new song) 찬양하도록            (commanded)하셨기에

시 33:3; 40:3; 96:1; 98:1; 144:9; 149:1 계 5:9; 14:3

③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노래를            (relate)하기 위해서

특별히 많은 젊은 사람들(young people)과 새로운 사람들을 위해서

SCC의 러셀 목사는 언제나 새로운 찬양을 선호하고 배우며 가끔씩 오래된 찬송을 사용한다고 했는데 그는 교회를 낡은 패션(old-fashioned)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 둘째, 왜 오래된 찬송가를 불러야 하는가?

① 많은 오래된 찬송가(ancient hymns)는            (doctrine)으로 채워졌기 때문에

Martin Luther

           (Past)와            (Present)를 이어주며 다른 성도들과 묶어주며(tied) 지켜주기에

③ 교회에 오는            (guests)에게            (familiar)를 갖게 하기에

또한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는데 도움을 주기도 함(성탄찬송)

※❉ 셋째, 음악스타일의 균형을 시도하라.

음악의 균형을 맞춘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브라스 사운드를 하는 빅 밴드(bis band)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전혀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의 회중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교회들마다 찬양을 선곡하고 음악의 스타일에 있어서 충돌을 하는 경우가 있고 음악 스타일에 대한 강한 의견으로 인한 마찰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옳고 틀림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신의 환경과 문화에 대한 의견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배 스타일이란 자신의 흥미나 자신이 선호하는 것을 고집하는 차원에서 수락을 한다면 어려움을 겪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어떻게 영적인 충만함이 있어야 할가를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음악의 스타일은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이나 영적인 수준(level)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배경은 자신과의 문화 차이라는 것입니다. 회중들이 수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최선을 음악을 우리 교회의 예배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거룩한 열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선호도를 바꾸는 것에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현대 사람들은 어떤 교회 음악을 선호하는가? 어떤 음악의 스타일을 회중들은 원하고 있는가? 시끄러운 록(rock), 전통적인 클래식(classical), 향수에 젖는 컨트리(country), 재즈(jazz) 스타일의 다양한 음악의 스타일에서 젊은이들은 강한 비트가 있는 음악들로, 나이가 든 사람들은 부드러운 음악의 스타일로 길들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균형을 맞추는 것은 어느 부류의 사람에게라도 만족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회중을 위한 것도 좋지만 예배의 목적(Purpose)을 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가장 먼저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인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자들의 중심이 중요합니다. 어떤 스타일의 예배나 음악이 우리의 싸움이 아니라 그들이 예배를 드릴 때의 마음이 진정으로 ‘순전한 마음’(a pure heart)으로 준비되어 있는가에 있습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예배는 교회 성장의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특히 주일예배는 모두가 모이는 예배가 되게 하며 목사는 예배준비를 위하여 매일같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혼자서 예배를 모두 인도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회중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필드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교회 성장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바른 교회를 세우고 신앙의 바른 질서를 위해서라도 예배를 강조하고 예배 설교와 예배 훈련을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합니다.

3. 리더십-Leadership

러셀은 말하길 ‘당신은 본(example)을 보이는 사람이지 특수한(exception)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SCC의 부흥과 성장 그리고 새로운 교회를 건축할 수 있었던 비결은 먼저 하나님께서 축복을 부어주셨기 때문이라고 했고, 리더들이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힘을 다하였다고 했으며, 회중들 가운데 하나님이 일하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탁월한 리더십(excellent leadership)입니다. 리더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 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교회이든 교회의 리더들에게 특히 목사에게 좋은 리더십(good leadership)이 필요한 것입니다.

1) 유능한 리더가 되려면                    (personal character)을 가꾸어라.

목사의 모든 경우 도덕적인 개인의 삶에 실패할 때 무너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재능(talent), 카리스마(charisma), 탁월함(intelligence), 과감함(decisiveness), 설득력(Persuasiveness)에 유능할지라도 개인의 삶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는 그의 목회를 망치게 될 것입니다. 목사들에게 교회 성장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고안(gimmicks), 프로그램(Programs), 아이디어(ideas)가 좋아야 한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성별(consecration)과 진실로 헌신(genuine commitment)된 리더 목사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리더십을 자격(qualification)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에 개인의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며 강조하는 것이 그것 때문입니다. 리더십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앞서 나는 누구인가의 정의에서 출발을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처럼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고도 심한 벌을 받은 것은 성령을 속였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고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리더는 거룩한 사람이어야 당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깨끗해야 합니다. 리더는 깨끗해야 합니다. 또한 리더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완전한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충성과 성실을 요구하십니다. 교회 안의 리더그룹도 똑같은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인격이나 성품의 바탕이 하나님 편에 서 있어야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목사나 리더는 어떤 성품(character)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목사의 개인적 3가지 캐릭터

첫째,                           purity

교회사역에 봉사하는 사람들이 정결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세상은 조롱(mocks)을 할 것입니다. 러셀 목사는 매년 스텝 리트릿(staff retreat)을 할 매 항상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데 그것은 정결(Purity)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더 말하길 ‘나는 그들에게 기억되게 하는 것은 그들이 SCC를 위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고 하나님이 얼마나 축복하셨는가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기억시키는 것은 그들이 깨끗하게 사는 것을 유지하지 못할 때 얼마나 파괴 될 수 있는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르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간 (수 7:21)과 같은 사람에게는 축복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나 교회의 리더들은 깨끗해야 합니다. 만일 깨끗하게 살아가는 삶이 아니면 하나님은 회중들에게 그를 통해 축복하지 않습니다.

둘째,                            -sincerity

어떤 완벽한 목사가 되라든지 완벽한 행동을 하라는 것을 하나님이 목사에게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한 척하는 것은 위선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위선자(hypocrite)는 존경하지 않습니다(마 23:3). 교회의 리더들에게 어려운 것은 확실성(authenticity)과 영성(spirituality)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만일 목사가 완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목사를 보고 실망을 할 것이고, 만일 목사가 죄성을 그대로 드러내면 사람들은 목사를 존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을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가 실수를 하더라도 정직하게 말하면 누구나 용서를 합니다. 무서운 것 중의 무서운 것은 실수를 변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사에게 완전함이나 완벽함을 묻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원하십니다(베드로의 예수님 부인 사건). 목사는 말이나 물질이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셋째,                           -humility

정결과 정직은 겸손한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을 하지만 무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름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름이 나지 않았지만 뒤에서 봉사를 한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SCC는 장로들의 이름을 주보에 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정말 겸손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에게 칭찬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텝들은(부목사)은 의자를 옮기고, 쓰레기를 줍고, 방문자들을 맞이하는 일들을 성공적으로 하도록 어느 곳에서든지 관리자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길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3-4)고 했습니다. 교회의 리더와 스텝은 이와 같은 겸손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SCC는 교회를 옮기기 전에는 주차장 문제로 시달렸습니다. 그때 제안한 것이 장로, 집사, 스텝들 그리고 러셀까지도 셔틀버스를 타고 교회로 왔고 주차장은 새롭게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비워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의 실천입니다. 목사는 겸손해야 합니다. 목사가 낮은 자리에 있어야 성도들도 낮아집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너무 자긍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낮추는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목사가 낮은 자리에서 봉사 하지 않으면 그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2:5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리더의 성품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닮은 자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리더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된 마음의 소유자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SCC의 교인들이 밥 러셀 목사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이 “Just plain Bob”이라는 ‘숨김없이 솔직한 밥(사람)’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인격이나 성품은 치장을 부릴 수 있는 팬시(fancy)가 아닙니다.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을 놓이는 특성을 갖은 사람이 리더입니다.

❉ 밥 러셀 목사가 스텝들에게 바라는 14가지의 촉구(challenges)

➀ 말이나 행동에서                          (moral purity)함으로 살 것 - 엡 4:1

➁ 교회 재정과 일에 대한                          (responsibility)을 가질 것 - 엡 5:15

➂ 매일 일에 대해                          (honest)할 것

                         (flexible)과                          (open) 마음을 도전 할 것

➄ 교회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Participant)할 것

➅ 교회 생활과 교회 활동에 최선을 다할 것

                         (information)에 대해서 주의 할 것

➇ 스텝과 다른 사람들과                          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 할 것- 엡 4:3

➈ 당신의 감독과 리더를                          (supportive)할 것 - 히 13:17

                         이 될 것 - 엡 4:2

⑪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example)이 되는 사람이 될 것

⑫ 당신의                          (Pay)에 대해 만족 할 것

⑬ 당신의 가족들에게                          (Proper attention)을 줄 것

⑭ 그리스도에게 경이로운                          (serving)을 결코 잃지 말 것 - 롬 12:11

2) 유능한 리더가 되려면                           (Leadership capability)을 개발하라.

리더가 리더십의 은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리더십에 치명적인 문제가 일어날 것입니다. 로마서 12:8에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govern diligently) 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리더의 자세입니다. 리더는 리드(lead)하기 위한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탁월한 리더십을 정의할 때 결정력(decisive), 조직력(organized), 비전력(visionary), 고무력(inspiring)을 듭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의 리더십은 다릅니다. 목사나 교회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리더십은 사회과학적 요소보다 성경적인 교회의 요소가 더 필요한 것입니다.

❉ 교회의 리더에게 필요한 리더십의 4가지 능력

                                                              

  (courageous confrontation of problems)

성장하는 교회는 그 교회의 성장을 저지시키기 위해서 자주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됩니다. 사탄은 살아있는 교회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파괴시키기 위해서 온갖 방법들을 동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잘 성장하고 있을 때 하나님과의 영적 위치와 관계가 잘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문제가 일어납니다. 특히 성장하는 교회는 문제들도 많아집니다. 더 크게 성장하려면 넘어야 할 문제들이 더욱 크고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때 리더십의 능력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오하이오 주의 스프링필드에 있는 제일 크리스천 교회 (First christian church)의 목사인 존 윌슨(John Wilson)은 말하길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이것이 홍역(measles)인가 아니면 암(cancer)인가를 리더는 결정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만밀 홍역일 경우는 스스로 사라지겠지만 만일 암인 경우는 뿌리를 뽑아야(eradicate)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고하기를 잘못된 가르침은 부패(gangrene;썩게 하는 부패의 근원)와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딤후 2:17).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경계를 받은 것이 바로 많은 문제들을 일으켜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고전 5장, 고전 1장) 그들에게 ‘치리서신’을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리더는 교회의 악성의 문제들(malignant problems)을 직면하게 될 때 성경적으로(scripturally), 사랑으로(lovingly), 열린 마음으로(openly) 문제를 처리해야 합니다. 반면에 일반적인 리더들은 오히려 사람들의 반응에 많은 시간을 지나치게 써버립니다. 그들은 무엇이라고 말할까? 어떻게 그들을 방어할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떠날까? 그러나 일류의 리더는 가장 큰 관심이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우리들 가운데서 어떻게 일하실까 에 둔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위기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리더가 담대하고 용기 있게 하나님을 붙들고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말씀을 기초로 하여 결정을 내린다면 조직이나 성도의 이탈은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습니다.

                                                           

   (An attitude of reasonable flexibility)

성경을 신뢰하는 교회는 진리에 절대적입니다. 좋은 리더는 성경의 말씀 외에는 아무 것도 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한 좋은 리더는 융통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만일 리더가 율법주의(legalism)를 내세우면 안 됩니다. 슈바르츠(Christian Schwarz)는 32개 나라의 1000여 교회들의 상태를 조사하면서 그가 발견한 것은 건강한 교회의 교인들은 오직 10%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전통주의(traditionalism)와 전쟁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50%의 사람들은 자질이 낮고 죽어가는 교회(dying church라고 하면서 그들의 교회에 대해 말하길 그 교회는 ‘전통에 묶여있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리더들은 아직도 완강하게 전통을 유지하는 것을 자랑(brag)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결코 세우기 위한 의식이 아닙니다. 주님이 디자인하신 교회는 예배스타일, 음악스타일, 조직스타일, 행정스타일, 사역스타일 모두 변화를 필요로 합니다.

리더는 교회를 세우는데 두 가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원리, 목회원리, 사역 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아니면 방법과 수단이 원리보다 앞서는가? 원리란 가장 기초적으로 교회를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방법은 원리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도구입니다. 역할이 없이 도구만을 추구하면 교회는 혼란에 빠지고 도구도 없이 역할만 강조하면 정적인(static) 교회가 됩니다. 리더십은 이 둘을 조화 있게 사용하되 특히 사역에 융통성을 합리적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현대교회 흐름은 변화에 있습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변화에 초점을 두는 교회입니다. 목사는 교회를 고정관념으로 끌고 가지 않도록 주의하고 최대한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Open support of the other leaders)

신약 성경은 교회의 리더들을(평신도 사역자포함) 섬기고 지원하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12-13에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서로) 화목하라”는 리더들과 협력하는 것은 교회 성장을 위한 필수입니다. 교회의 목사나 장로나 집사는 리더들을 격려하는 것은 책임이며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제직들은 교회 일을 위한 도장을 찍는 워치의 자세보다 사람들을 격려하고 세워주는 일이 우선입니다. 목사는 설교를 하며 목회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 목사를 위하여 도와주고 관리해 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리더는 이런 메시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리더가 교회를 사랑하며 열정적인 헌신으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는 교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목사는 교회의 리더들을 세워주고 그들이 효율적으로 사역에 참여하도록 열려있어야 합니다. 자기만을 위한 사역을 하면 더 이상 교회는 자랄 수 없습니다. 리더십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일들을 나누고 그 일들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에 있습니다.

                                                             

   (Progressive delegation of responsibility)

교회의 공동체에 책임이 상실되었다면 그 교회는 자연적으로 사랑과 사역 모두가 깨어질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의 일을 잘 하는 것과 직분자들은 자신들의 일을 잘하는 것은 건강한 교회가 되는 비결입니다. 사도행전 6장 교회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문제입니다. 교회는 각자의 기능이 잘 발휘되어야 합니다. 좋은 리더는 교회의 모든 책임을 공유하고 권한을 위임합니다. 교회의 영적 관심사와 교회의 정책들에 대해서 서로 나누고 결정된 사항들에 대해서 서로 위임을 받은 대로 성실하게 사역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크게 성장하려면 책임을 서로 지고 위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 사역이나 리더를 세우는 사역은 교회에 중요한 사역들입니다. 목사도 책임감이 있어야 하겠지만 리더들도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합니다.

3) 리더십에 대한 실용적 제안

교회에는 어떤 사람도 개인적인 성품과 재능이 탁월하고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리더십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장로와 집사들을 개발하고 리더십에 대한 정기적인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스텝의 리더십, 장로의 리더십, 자신의 리더십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Develop a quality ministry staff)

첫째,                                          

   (Hire the right person)

이 말은 바른 것 같지만 실수하기 쉬운 선택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사람을 고용하라는 말은 항상 순결한 사람을 고용하라(Always hire the person with integrity)는 것입니다. 사람은 능력이나 재능보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격과 성품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깨끗한 사람이 바른 사람이고 거룩하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바른 리더입니다. 목사는 올바른 사람을 선택하여 올바른 일을 맡길 수 있는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올바른 사람은 전인격으로 준비된 사람이고 목사와 함께하는 비전과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질적 지수(quality index)가 낮은 사람은 사역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충분히 그의 자질과 능력을 테스트하고 비용을 지급하는 스텝이든 자원봉사자이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둘째,                                       

   (Demand purity)

SCC는 스텝에 대한 가이드라인(guideline)이 있습니다. 1) 이성과는 상담하지 않는다. 2) 이성과는 여행하지 않는다. 3) 이성과는 만나지 않는다. 4) 이성과의 포옹이나 터치를 조심한다. 교회의 리더들에게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정결’입니다. 리더들에게 도덕적인 문제가 발생할 경우는 빠르게 그리고 지혜롭게(quickly and wisely) 행동해야 합니다. SCC는 적어도 1년 동안을 훈련받게 한 다음 스텝으로 고용한다고 했습니다. 적어도 교회는 스텝들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한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교회가 더욱 깨끗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만일 스텝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영적으로 본을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성과의 문제, 재정의 문제, 사람과 관계의 문제, 습관의 문제에 대해 확인하고 정결한 스텝과 파트너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Deal with a poor worker wisely)

교회는 비즈니스의 장소가 아닙니다. 만일 도덕적인 문제일 경우는 즉각적으로 다루어야 하지만 능력의 부족과 지혜롭지 못하게 일을 하는 것, 스텝들과의 하모니를 이루지 못하는 것에는 관대함을 가져야 합니다. 기회를 통하여 정확하게 일하는 것을 배우게 하고 문제 해결을 배우는 기간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너무 빠르게 결정을 하여 스텝들이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매사에 소극적인 자세가 될 것입니다. 일을 처리하는 속도나 기술이 늦더라도 시간의 여유를 주고 목사가 바라는 기준까지 오르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부교역자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원하는 완벽하게 준비된 자질이나 자격을 갖춘 사람을 고용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설사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오히려 그들이 목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훈련을 시킨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혜롭게 스텝을 다루는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넷째,                                            

    (Have an annual staff retreat)

SCC의 경우 여름철에 3일 동안 외부에서 연수회를 갖는데 그 목적을 3가지라고 했습니다. 1) 서로에게 감사하기 위해서 2) 서로가 좋아하며 배우기 위해서 3) 미래의 하나님의 계획을 알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연수회 때에 반은 서로를 알기 위해서 흥미위주의 활동을, 그리고 나머지 반은 그 해의 목표를 위한 촉진과 발전, 그리고 미래의 계획을 위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러셀 목사는 리트릿의 첫 날 밤에는 스텝들의 상태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그 다음은 서로 예배하고 기도하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스텝 리트릿을 하는 이유는 동질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서로 사역하는 부서나 역할은 다르지만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돌보고 효과적인 결과를 위하여 서로가 하나 되는 마인드를 갖기 위한 시간을 별도로 갖는 것입니다. 너무 일을 위한 리트릿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텝들이 서로 섬기는 자세나 서로 헬퍼 역할을 하도록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게 해야 합니다.

다섯째,                                                          

      (Encourage family commitment)

교회의 스텝들은 하루 24시간 늘 교회에 헌신하는 마음으로 지냅니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자신들의 가정이나 가족들에게 소홀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가족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자니라”(디모데전서 5:8). 남편은 아내에 대해서는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에베소서 5:25). 아내들에 대해서는 남편을 존경하라고(엡5:22-23), 아버지는 자녀들을 가르치고 말씀으로 훈계하라고(엡 6:4)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너무 가족들에게 등한히 함으로 오는 아픔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들을 돌보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특별한 별도의 시간들을 스텝들에게 주어 가족들이 소홀함이 없이 함께 보낼 수 있도록 정기적 휴가를 통한 가족시간(family time)을 제공해야 합니다.

여섯째,                                              

   (Develop esprit de corps)

스텝은 그 조직을 위하여 서로가 함께 공동의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같이 좋아하고 웃고 서로를 따르며 교회를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고 일을 같이 하도록 해야 합니다. 러셀 목사는 일을 위한 스텝들과의 정기적 미팅은 오히려 낭비의 시간이라고 했고 교제(fellowship)의 시간은 생산적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서로의 단결과 단체정신을 갖는 것은 스텝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일만을 위한 직장의 개념에서 서로 공동의 목적을 위하여 하나 되었다는 정신은 사명으로 승화되고 일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게 합니다. 팀워크는 사역을 효율적으로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현대목회는 팀 사역을 필요로 하고 팀의 건강함은 서로가 같은 목적과 정신에 있습니다. 교회 사역의 핵심 인물일수록 독자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팀워크를 통해서 일하도록 해야 합니다.

                                         

 (Encourage leadership among the Elders)

첫째,                                          

  (Uphold the biblical qualifications for elders)

장로의 자격은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에 있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높은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로는 성경의 지식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장로는 인격과 리더십의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장로는 신앙의 기초가 되는 주일성수와 규칙적인 참석,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교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품위와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다스릴 수 있으며 성도를 돌보기 위하여 섬기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                                          

    (Select elders wisely)

SCC의 장로 선택 기준은 러셀 목사와의 끈질긴 인터뷰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장로는 종처럼 일하는 사람이기에 말씀대로 양육과 훈련을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자격에 맞아야 하고 놓은 차원의 자격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 길은 집사 때부터 바르고 잘 훈련 받아야 한다고 러셀은 강조했습니다. 장로는 교회의 리더입니다. 영적으로나 교회를 섬기는 것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롭지 못한 장로는 교회에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방해가 됩니다. 장로를 선택할 때 오랜 기간 동안 확인을 하고 목사의 목회에 동의할 때 세워야 합니다.

셋째,                                          

   (Encourage elders to get to know one another)

장로들은 대부분 회의 때에만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시간을 내서 가치 있는 시간들을 보내는 장로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게 되고 결국 교회의 일들을 의논하게 될 때는 감정적으로 대립하게 됩니다. 러셀 목사는 장로들과 자주 골프를 즐기고 웃고 놀고 짓궂은 장난(teasing)을 하는 시간을 보낸다고 했습니다(한국문화와 다르기에 주의요). 그리고 일 년에 정기적 연수회와 여행을 간다고 했습니다. 그런 시간을 갖는 목적은 서로에 대해서 아는 기회와 시간을 배려한다는 것입니다. 러셀은 자랑하기를 장로들은 자기의 가장 강한 팬(fans)이라고 했습니다. 항상 목사를 격려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넷째,                                          

   (Find tangible ways for the eldership to support the staff)

SCC는 거의 매달 장로 미팅을 가질 때 부서의 스텝들을 초청하여 어떻게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사역에 대한 보고와 각 파트에 하나님의 일하고 계심에 대한 내용을 듣고 격려하기도 하고 질문을 하고 기도제목이 있을 때는 함께 기도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모임에서 하는 일은 스텝들의 사역에 대해 판단을 하고 질책을 하기 워한 것이 아니라 지원(support)하기 위해서 입니다. 장로들은 모든 사역에 대해서 다른 전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장로는 일을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쉽게 잘할 수 있도록 스텝들을 격려하고 도와주어 야 합니다.

                                         

    (Develop your own leadership qualities)

첫째,                                          

 (Live an authentic life)

사람들은 리더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어떤 옷을 입는지, 차는 무엇을 타는지, 운전은 어떻게 하는지, 어디에서 식사를 하는지 등 관심을 갖고 리더를 봅니다. 그러므로 주의해야 할 것은 리더의 삶입니다. 그것은 본을 보이는 삶입니다(고전 11:1). 바울은 디모데하게 “(딤전 4:16)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고 본을 보이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했습니다. 목사는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삶이나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적어도 양들을 돌보는 목양을 위해서는 선한 목자인 주님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불성실한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습니다. 성실함을 주무기로 해야 합니다.

둘째,                                          

  (Take time off for spiritual development and rest)

어떤 목사가 말하길 ‘나는 절대 휴가를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결코 휴가를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의 교인 중의 한사람이 말하길 ‘우리 목사님은 오직 악마만 기억나게 하십니다’라고 조크를 했다는 것입니다. 러셀 목사는 여름에 5주간의 휴가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미래에 대한 계획, 설교와 사역을 위한 브레인스토밍의 기회를 갖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휴식을 끝내고 돌아오면 사역이 늘 새로운 것과 신선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화요일)는 규칙적으로 휴식의 날로 갖는데 자신은 슬로윙 다운(Slowing down 감속)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휴식을 취하는 것은 도끼의 날을 날카롭게 하는 날로 육체적 영적으로 재생명력을 주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목사는 영적 생산을 위하여 쉼을 가져야 합니다. 정기적인 쉼의 스케줄을 만들어 생산적으로 쉼의 시간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쉰다고 해서 모두가 생산을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쉼의 계획이 분명하게 짜여 있어야 합니다.

셋째,                                          

   (Be accountable to someone)

찰스 스윈돌(Charles Swindoll)은 말하길 ‘목사들이 사역에 실패하는 이유는 도덕적 실패자(a moral failure)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리더는 유별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다른 사람을 위해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목사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사는 사람으로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위험한 영토(dangerous territory)에 들어가는 행위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안의 교인들이든 누구이든 사랑의 관계와 그들의 위험과 문제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리더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서만 공동체를 돌보고 그들을 섬기는 것에 소홀하다면 그는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유별난 사람이나 튀는 목사가 되려고 하지 말고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목사로서 리더는 사람들 가운데 (among) 있는 사람이지 위에(above)서 군림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넷째,                                          

    (Love your family)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주 실수하는 것이 가정과 가족들에 대한 소홀함입니다. 당신의 반려자와 당신의 자녀들은 가장 중요한 당신이 돌보아이 될 우리의 앙입니다. 당신의 가족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교회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가족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사랑하게 됩니다. 물론 가족이 주의 일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왜 희생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무조건 목사가 하는 대로 따라오라는 것은 가족들과의 거리감을 넓게 하고 결국은 외톨이가 될 수 있습니다.

다섯째,                                          

     (Stretch yourself)

리더들은 성공의 정점(Pinnacle)에 도달하게 되면 자주 매력을 잃거나 환멸을 느끼게 되고(disenchanted) 정체한(stagnant) 느낌을 갖게 됩니다. 노아나 다윗도 성공 후에 그들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면 성공하는 것보다 성공한 후의 처신이 훨씬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공하고 유명해 지고 나면 다시는 도전하지 않고 오히려 욕심만이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영적 침체기에 있을 때 그 때가 하나님이 새롭게 도전하라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깨어 있어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며 일을 하시려는지 살펴야 합니다. 새로운 목회사역, 교회 건축 프로젝트, 선교여행 등 어느 경우든지 하나님께 집중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도전하고 당신의 섬기는 교회를 위하여 도전을 해야 합니다. 현재의 나는 아직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의 중간 지점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교회는 정말 본을 보이는 좋은 남녀의 리더가 필요합니다. 오랜 영화 가운데 ‘비바 자파타’(Viva Zapata)라는 영화가 있는데 이 영화가 유명한 이유는 늙은 자파타가 죽으면서 아들에게 한 말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길 ‘문제가 오고 있습니다.(Trouble is coming). 자파타는 아들에게 말하길                          

                                           (Find a leader. If you can't find a leader, be a leader). 그 아들이 이 말에 용기를 얻어 도전을 하여 멕시코의 가장 위대하고 화려한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이든 앞으로 어떤 문제들이 다가올 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 리더십이 필요한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리더를 찾는데 도전을 하십시오. 그러나 찾을 수 없다면 당신이 리더가 되십시오. 교회는 무거운 책임이 있는 곳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리더들은 책임을 다하여야 합니다. 능력의 성령님의 인도를 적극적으로 기대하고 리더로서 자신감 있게 도전하며 주의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 액설런스 - Excellence(탁월함)

SCC의 모든 스텝들은 탁월함과 우수성을 갖고 일하는 것을 사랑한다고 러셀은 말했습니다. 골로새서 3:17에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는 주의 일을 할 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 탁월하게 사역하는 원리

1)                                           

   (Evangelism demands our best effort)

                                          

  (Experiences of mediocrity)

예배 시작 전에 와서 기다리고 안내위원은 지루하게 피곤한 모습으로 무표정하게 서 있고, 예배는 늘 10분 정도 늦게 시작되고, 반주자의 모습은 서투르고, 갑자기 교인 중에서 한 사람이 찬송가 몇 장 부르자고 소리를 지르고, 강단에 올라온 목사 또한 얼굴이 일그러져 있고, 예배가 진행 되면서 예배에 나오는 순서를 맡은 사람들은 빠지고, 준비는 안 되어 있고, 설교는 한 없이 주제도 없이 흘러가고, 교인들은 아멘을 하는 소리도 없고, 헌금 시간은 오는데 뒷자리에 앉은 헌금위원 집사는 일어나면서 성경과 찬송가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소리를 내고, 헌금바구니는 지나가고, 새신자 초청이나 환영을 하려는데 새로 나온 사람은 없고, 예배가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빨리 빨리 교회를 떠나가고, 교회 문은 바로 닫히는 그런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겪고 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예배에서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복음전도를 하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The attraction of excellence)

만일 환상적인 광경을 보면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자신이 본 것을 전달하고 싶어 합니다. 예를 들어 예배를 드렸는데 감명과 감동을 받은 탁월한 예배를 체험했다면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안드레가 그의 형제 베드로에게 가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한복음 1:41-42). 안드레는 시몬을 데리고(brought) 예수께 왔습니다. 왜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올 생각을 했습니까? “메시야를 발견했기(found the Messiah)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한 것도 동일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 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한복음 1:45-47). 빌립도 예수님을 발견했던 사람입니다. 얼마나 체험이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SCC는 일 년(2001)에 교인들이 교회로 초청하는 사람들의 수가 14000명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전교인의 90%가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에 대해서 러셀은 말하길 그들은 매주 교회에서 충격을 받을 정도로 체험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SCC는 안내, 찬양, 예배, 설교, 양육 등이 탁월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교회가 준비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았고 전도에 대한 열정도 없고 환영하는 교회의 모습도 하고 있지 않다면 어떤 교인이 ‘와서 보라’고 감동적으로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가 최선을 다하여 탁월함을 보여 줄 때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말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2)                                           

(Observations about excellence)

                                          

(Excellence takes hard work)

탁월하게 일한다는 것은 힘든 노력을 우선으로 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SCC의 스텝이나 예배 봉사자들은 2시간 전에 와서 예배준비를 한다고 했습니다. 러셀 목사는 한편의 설교를 위해 매주 15-20시간을 준비한다고 했습니다. 러셀 목사 자신이 발견한 것은 ‘좋은 설교’(a good sermon)와 ‘탁월한 설교’(an excellent sermon)의 차이는 바로 5시간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탁월한 설교를 하려면 더 열심이 해야 합니다. 탁월함이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SCC 성도들은 교회의 건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아름답게 세워져야 올바른 것이라고 하면서 청소부터 건물을 관리하고 잔디를 보호하는 것에 최선을 노력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바닥에 먼지하나 없이 밤을 새우면 청소하고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있기에 교회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알고 있는 것은 SCC가 얼마나 탁월한 교회로 만들기 위하여 수고하는 열심이 있는 교회인가를 사람들이 인정하고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장은 힘든 노력의 결과입니다.

                                          

(Excellence is evidenced in the details).

SCC는 어느 부서이든지 자원하는 봉사자들이 넘치는데 그 이유는 모든 것을 탁월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이 원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자원봉사자들도 충분한 훈련을 통해서 가르치고 관리하고 확인하며 최고의 우수한 일꾼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활절 행사나 교회의 프로그램들을 준비할 때 하나하나 세밀하게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빈틈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을 위한 리더십 컨퍼런스에서 참가자의 이름표(nametag)에 이름이 틀렸을 때 자원 봉사자가 발견하고는 새로운 것으로 다시 프린트해서 만들어주는 것은 항상 세밀하게 끝까지 마무리하는 모습 중의 졸은 예가 될 것입니다. 탁월함이란 세밀한 것인 동시에 명확하게 끝맺음까지 잘하는 것입니다.

                                          

(Excellence takes daily diligence).

새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고 해서 그 집이 영원히 아름답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손질을 하고 페인트를 칠하고 유리를 닦아주고 고장 난 것은 고쳐주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쉴 수 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고 탁월함을 유지하려면 계속해서 끊임없이 일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시작하는 프로그램이 탁월했다면 그 다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하는 부지런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 교회는 왜 탁월하지 않는가 하고 의문하게 된다면 어떻겠는가? 어떤 교인은 생각하기를 예배를 정시에 시작하지 않고, 주보에 글씨가 틀린 상태로 그대로 있고, 주차장의 불은 꺼져있고, 주일학교가 무성의하다고 생각할 때 교회에 대해서 불만과 불평을 늘어놓지 않겠는가? 교회는 끊임없이 살피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모습으로 탁월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처음 직원들을 뽑을 때 그들에게 주의시키는 것은 어떤 일의 성취보다 탁월함의 정신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탁월함은 노력하는 부지런한 습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3)                                           

   (Negative results of striving for Excellence)

탁월한 교회와 사역을 위하여 헌신하게 될 때 발생하는 두 가지 부정적 문제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첫째는 당신의 헌신에 대해 거만하게 판단하며 비판(criticism)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탁월해지는 것에 대해서 분개하머 화를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면서 탁월해지는 것을 반대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연기를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탁월함이란 교회를 세우는데 사람들의 은사를 쓸모 있게 사용하도록(utilizing) 만드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한 일입니다. 둘째는 당신이 탁월함을 위하여 분투하게 될 때 실망(disappointment)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취되지 않고 성공하지 않을 때 찾아오는 실망감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마인드를 절대적으로 확신하며 완벽한 그림을 준비하고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완벽함을 위하여 분투해야 합니다. 또한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는 결심을 늘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분투하며 행동한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은 멘탈리티를 소유해야 합니다. “푯대를 향하여”(빌 3:14)라는 탁월함을 이룰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4)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조언

  (Some practical advice)

                                          

   (Set the standard for excellence early)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초기의 시작이 중요합니다. 만일 처음 출발부터 기준 설정을 잘못한다면 결과는 탁월함이 아니라 나쁜 결과만을 만들어내게 될 것입니다. 탁월한 교회와 탁월한 사역을 원한다면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시작을 잘해야 합니다. 탁월한 것을 하겠다고 결심하고는 며칠이 못되어 포기하거나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신뢰하지 못할 것입니다. 무엇을 하려고 결심하기 전에 먼저 생각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자기의지입니다. 새롭고 탁월한 것을 이루는 것은 자신에게 공동체에게 기준 설정을 잘하는 것입니다.

                                          

   (Don't trust your eval!!uation)

최고 수준의 준비를 한다는 의미는 그 일을 최상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만족을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이 더 준비를 한다는 것은 당신이 불만(dissatisfied)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더 놓은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당신의 기대(expectation) 수준은 준비(Preparation)의 수준과 직결됩니다. 만일 설교 준비를 하는데 만족스러운 설교를 하려면 15시간 이상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을 때 6시간 정도 밖에 준비하지 않았다면 그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탁월한 설교를 한다고 했는데 그보다 더 적은 시간을 설교 준비하는데 보냈다면 그는 불만 정도를 넘어 실망하고 말 것입니다. 내가 기대하는 기대치는 준비하는 시간치와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탁월하게 만든다든지, 설교를 탁월하게 한다는 것이 목표라면 준비와 기대의 수준도 탁월해야 합니다. 너무 일에 대한 평가나 판단보다 준비하는데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당신이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생각보다 더 탁월하게 만들기 위해서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조심할 것은 너무 기대치가 높으면 정말 실망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당신이 만족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어서는 안 됩니다. 탁월하게 성장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준비하고 또 준비하는 일입니다. 당신의 준비가 멈출 때 교회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Do only that which can be done with excellence)

당신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이나 기회들이 모든 성도들에게 도달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교회의 행사나 프로그램들이 사람들을 돕는 것은 첫 번째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가장 심각하게 생각할 것은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 프로그램이나 행사들이 얼마나 교회를 세우고 본질적으로 주님의 교회 사명을 성취하고 있는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목회의 기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더 좋은 사역을 할 수 있는 기회(a good ministry opportunity)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교회의 사명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런 것들이 도움을 줄 수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할 때는 탁월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충 그리고 어설프게 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것입니다. 탁월하기 위해서는 탁월하게 해야 합니다.

                                          

   (If an activity isn't fruitful, Drop it)

교회에서 자주 보는 것은 좀은 아이디어들이 몇 년간은 효과를 보이다가 그 다음에는 휘청거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몇몇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지켜야 한다는 교회의 전통에 대해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에서 하는 행사나 프로그램들이 교인들에게 억지로 하게 한다든지, 하기 싫은 일을 단조롭고 지루하게 강요당하면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며, 그들에게 도달하지 않는 것이라면 다음 해에는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어떤 아이디어는 죽여야 할 것도 있고 묻어야(burial) 할 필요도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하게 될 때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생산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분석을 한 후 버리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잘 성취되지 않는 일을 위하여 에너지를 쏟는 것보다 다른 사역이나 잘 될 수 있는 사역에 집중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ncourage service in areas of giftedness)

어떤 일을 탁월하게 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더 놓은 자질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교회에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사역을 탁월하게 하기 위해서는 지원하는 그 사람에게 자질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싱어로 봉사하려면 음악의 자질이 있어야 하고, 교사가 되려면 가르치는 자질이 있어야 하고, 영아들을 위해 사역을 하려면 어린아이를 사랑하는 자질이 있어야, 그는 그 일들을 탁월하게 할 수 있고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새로운 단계의 유능함으로 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질(gift)이나 재능이나 은사가 없다면 일을 잘 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위하여 찬양하는 솔로가 열심히 불렀지만 재능이나 자질이 전혀 갖추어 지지 않았다면 목사는 그에게 진리를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가 재능이 있는지 아니면 그런 은사 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면 그의 것을 찾아주어 그가 다른 것으로 탁월하게 봉사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몸을 이루는 곳입니다. 서로 자신의 자질과 재능과 은사를 조화 있게 사용해서 탁월하게 몸(교회)을 세우게 해야 합니다.

⑥                                            

 (Strive for excellence without extravagance)

SCC의 새교회 건축을 하게 될 때 과도하거나 무리하게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주 비싼 것들로 교회를 장식하는 대신 경비를 절감하며 효율적인 것에 치중했다는 것입니다. 탁월하게 일한다고 해서 무조건 비싼 것들로 채운다거나 많은 경비를 들인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언제나 효과적인 비용(cost-effective)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력 있고 좋게 보이기 위해서 경비를 많이 들이는 것이나 좋은 것만을 선호하다가 과도하여 포기하는 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의 재원을 계산하고 회중들이 기쁨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하여 효과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역을 할 때도 그 사람에게 너무 과도한 짐을 짊어지게 해서는 탁월하게 해낼 수 없습니다. 너무 많은 일에 대한 욕심이나 한계 가 없는 강요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더 이상 리더십에 동참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Have a sense of humor)

바울은 고린도후서 13:11에서 말하길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 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온전케 하는 일과 평안으로 하는 일의 균형을 잃지 말아야합니다. 일을 할 때 완전을 향해야 하지만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 너무 교회가 어둡고 일하는 태도가 불편하고 무겁게만 느껴지도록 한다면 사람들은 마음에 평안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건강한 유머와 그들을 배려하는 언어는 더욱 일을 탁월하게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실패에 대해서도 잘못했을 때에도 유머의 감각을 잃지 말고 사용함으로 그들에게 웃음을 주도록 해야 합니다.

5. 믿음-Faith

 

SCC의 밥 러셀목사는 교회 확장이나 성장을 워한 다섯 번째는 믿음의 원리를 강조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건물을 늘리고 시설을 확장에 가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예배의 개발이나 사역의 확대에도 미래를 준비하는 예측형 목회를 감행했습니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언어가 바로 모험적(risky)이라는 표현입니다. 교회 성장을 위하여 모험을 하는 것이 믿음의 행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모험의 믿음은 교회 성장의 필수입니다. 리더인 목사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가 모험의 믿음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러셀 목사는 모험의 믿음을 가리켜 비전(vision)이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비전을 요구한다(Faith requires viSion)는 것입니다. 비전은 앞을 바라보는 힘입니다. 리더이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든 항상 미래를 바라보도록 하고(looking to the future), 한발자국씩 앞으로 가도록 하고 (one step ahead), 앞으로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지(Where the church is going to be)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전 캐스터(a vision caster)였습니다. 눈을 들라(Lift up your eyes!)고 말씀하셨고,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고, 세상에 가서 제자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SCC가 성장해 갈 때 더 큰 교회로 성장을 하기 위해 고비를 넘겨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1983년 1000여명이 예배에 출석할 때 교회를 더 ‘거대하게’(gigantic) 10000명의 성도가 되는 비전을 가지고 땅과 돈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했을 때 성도들 가운데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전체의 20%를 넘지 못했고 나머지는 ‘너무 크다’(too large)라고 외면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 명의 교회가 될 것이라고 말을 하니 모두가 웃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러셀 목사는 말하길 ‘우리들의 믿음이 얼마나 적었는지.’(How small was our faith) 그러나 러셀 목사의 꿈은 그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자연적 반응(natural reaction)을 기대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 반응(supernatural reaction)을 기대하는 곳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큰 일을 성취하시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그 교회에 꿈의 사람들(dreamers)이 없이 조롱을 하고 있다면 그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지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는 곳이어야 합니다. 어느 교회이든지 그런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사람들은 소수이고 극히 적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묵시가 없으면(no vision)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언 29:18). 성도들에게 비전이 없다면 그 교회는 결국 정체 (stagnate)하든지 죽고(die) 말 것입니다. 성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목사나 커뮤니티가 추수하는 필드와 산을 움직일 수 있다는 믿음을 보는 일입니다. 믿음은 비전을 이루는 원천입니다. 교회의 미래를 비전으로 바라보고 그 비전을 이룰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성장을 주도하는 리더인 목사는 충만한 믿음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취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절대적인 믿음이 교회를 부흥시키고 새롭게 하며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간혹 교회 성장을 목사의 지식이나 새로운 아이디어에서 찾으려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지혜(wisdom)로도, 명철(insight)로도, 모략(Plan)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 (succeed)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0-31).

1) 교회 성장을 위한 비전(vision)의 원리

                                          

   (Listen to visionary people)

비전의 사람들이란 하나님의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둔 하나님의 사람들의 말을 듣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 누가 하나님의 심장과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그들이 말할 때 신중하게 그리고 즉각적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잠언 20:18에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Make plans by seeking advice)라고 했습니다. 목사는 비전의 사람들과 계획을 나누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목사는 비전이 있는 사람과 가까이서 일해야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일은 비전을 통해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Attend conference that lift your vision)

SCC는 일 년에 2번은 교회의 리더 그룹들을 유명한 교회나 기관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참석시켜 비전을 실현시키기 위해 자질과 능력들을 배우는데 투자를 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만이 아니라 교회의 리더들이 다양한 것들을 배움으로 당신 교회의 비전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와 교회의 리더들이 전략과 방법들을 접할 수 있도록 건강한 컨퍼런스에 참석토록 해야 합니다.

                                          

   (Visit churches where people walk by faith)

건강하게 성장하는 큰 교회들을 방문하는 것은 새로운 도전과 함께 그와 같은 교회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합니다. 그 교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하심에 순종했고 개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는 기회가 됩니다. 예배의 모습과 설교의 유형, 사람들을 환영하는 방법, 주보의 내용들, 찬양대들이 그리스도에게 얼마나 헌신하고 열심을 다하고 있는지 적은 일에서부터 큰일까지 세밀하게 관찰하고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사의 비전을 이루어 가는데 그런 교회들을 방문하여 얻은 수확들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만을 가지고 목회하는 것은 일방적이며 빈약한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성장하는 교회의 목사들은 다른 성장하는 교회에 대해서 잘 알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동질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교회성장은 이미 성장을 이룬 교회로부터 원리와 전략을 제공받는 것이 훨씬 효과적 입니 다.

                                          

   (Have regular brainstorming sessions)

창조적인 규칙적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교회 성장을 앞당기고 사역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돕게 됩니다. 물론 리더그룹의 미팅이나 회의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생산해내고 나누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비전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마인드를 갖는 기회를 정기적으로 갖는 것에 있습니다. 그 속에서 나눈 대화나 의견들이 성취되지 않을 수도 있고 엉뚱한 생각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만큼은 적어도 창조적 에너지를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Write a mission statement)

회중들이 교회의 사명선언문을 알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최우선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명선언문은 사역의 최우선 사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사명선언은 교회의 변화를 주도하고 교회가 성장하는데 목표를 제시하는 중요한 역할입니다. SCC의 사명 선언문은 이렇습니다.

                                                                      

                                                                     

(We exist to evangelize the lost, edify the saved, minister to those in need, and be a conscience in the community) 이렇게 간결한 사명선언문은 목적을 이루도록 만드는 힘입니 다. 신뢰하고 쉽게 이해하고 회중들이 쉽게 의견을 통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명선언문입니다. SCC는 90%의 멤버들이 사명선언문을 이해하고 동의하며 사역에 참여한다고 했습니다.

2) 교회 성장을 위한                                        (courage)의 원리

목사가 비전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비전이 때로는 잡을 수 없는 편견(bias)의 행동으로 끝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탁월한 비전을 갖고 있지만 교회의 리더들이나 사람들과 의견을 나눌 때 논쟁이나 분석을 하다가 비전을 이루기 위해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주저앉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동하기에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들은 게으르든지 아니면 비평에 대해 두려워하고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하며 두려워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리더는 결정을 내리는 행동, 결정을 내리는 시도 그리고 자신감이 있는 능력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유부단한 리더십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파괴 시킬 뿐입니다. 리더는 언제 결정을 내리고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기회와 시간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비전은 함께 나누고 비전에 대해서 의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비전을 이루도록 행동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채널(channel)을 맞추다가 결정을 하지 못한다면 비전은 연기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 한 자동차 회사인 클라이슬러사의 회장인 리 아이아코카(Lee laccoca)는 말하길 ‘                                          ’라고 했습니다. 러셀은 말하길 ‘만일 100퍼센트까지 확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이미 늦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100퍼센트의 확신이 오기 전에 결정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용기입니다.

교회에는 두 유형의 리더가 있습니다.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visionaries)과 관리자(administrators)입니다. 관리자는 실용적인 것을 담당하고 조직을 하고 세밀하게 분석을 하는 그룹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안정되게 합니다. 관리자는 단단하게 하고 신뢰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비전의 리더는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강한 믿음에 의해 이상적(idealistic)이고 낙관적(upbeat)이며 적극적(positive)입니다. 그들은 움츠러진 교회를 펼치게 하고(stretch)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데 변화와 발전을 위해 밀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마치 베드로처럼 물위를 걷겠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이 두 유형이 충돌을 하고 서로 정신적으로 대립을 합니다. 관리자들은 비용을 생각하머 현실적으로 판단을 하고 비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공급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비전 리더가 일을 벌리면 미결된 부분들을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관리자입니다.

교회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만일 비전의 사람들이 없다면 교회는 예측할 수 없고 실패에서 일어설 잠재적 힘이 없게 됩니다. 반면에 관리자가 없으면 조직이 부실하고 비전의 계획들이 실행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 두 그룹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함께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세워질 교회를 바라보며 현실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을 균형 있게 시행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3) 믿음으로 사역할 때의 결과(results)

                                          

   (generates enthusiasm)

믿음으로 위대한 목표를 세우게 되면 누구나 감동과 흥분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러셀은 ‘Big goals’ ‘큰 목표들’을 언제나 강조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대담한 목표(audacious goal)에 도전을 했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큰 것을 시도하기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a big God)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크신 분이시기에 큰 것을 시도하라는 것입니다. SCC의 슬로건은 ‘                                                                    

                                                                       

(Let's try something so big that if God isn't in it, we will fail)라는 하나님 을 절대적으로 의뢰하고 신뢰하는 믿음을 기초로 슬로건을 세운 것입니다. 정말 미래가 우리 교회를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것을 할 것이다’라는 크신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교회를 만들어야 교회가 성장을 하는 것입니다. 약하고 적은 믿음은 적은 일과 적은 교회를 만듭니다. 그러나 강한 믿음과 큰 믿음은 큰 일과 큰 교회를 만듭니다. 큰 믿음은 열성을 만들어냅니다. 목사가 큰 믿음을 소유하고 있으면 성도들은 자연히 열성을 갖게 됩니다. 열성이 준비되어 있으면 목표에 가까이 접근한 것입니다. 교회는 믿음으로 걷는 사람들에 의해서 성장을 합니다.

                                          

   (stimulates prayer)

만일 하찮은 일(molehill)을 한다면 그렇게 힘들게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형편없는 목표라면 기도가 절실하지 않겠지만 산을 옮기는 것과 같은 큰 목표라면 절대적으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 성장은 산을 옮기는 목표와 같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폭포수와 같이 부어지도록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목사와 성도가 위대한 목표를 세웠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위대한 기적(the biggest miracle)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나 교회의 거대한 목표는 성도들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자극을 줍니다. 믿음으로 크게 교회 성장을 이룬다는 것은 기도하도록 자극을 주게 합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은혜를 부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도록 만듭니다.

대담한 믿음은 큰 도전을 생산합니다. 큰 도전은 기도하도록 자극을 줍니다. 그리고 기도의 결과는 기적입니다. 믿음으로 사역을 할 때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로 변합니다. 위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기도의 불이 켜져 있고 가정이나 직장이나 어느 곳에서든지 기도는 계속될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기도가 약하다면 위대한 목표가 세워지지 않았거나 믿음으로 하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다 이루어집니다(마 17:20).

                                          

   (motivates sacrifice)

사람들은 감격적인 도전에 반응을 합니다. 교회의 목표를 이루는 것에 사람들이 시간이나 재정 지원에 인색하다면 그들은 현재 감격적인 도전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감격적이라는 표현은 거창하고 화려한 외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담아야 하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는 절대적인 필요를 느끼는 감정입니다. 교회 성장은 희생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희생적 반응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나 핵심멤버들이 희생을 원하지 않고 있다면 아직도 교회 성장이나 교회 목표에 대해 동기부여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려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희생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큰일을 이루는 것은 큰 희생이 있어야 하는데 결국 큰 믿음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성장은 성도들의 믿음으로 하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할 수 있다고 하면 동기가 부여되고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Produces harmony)

교회에서 서로가 자주 논쟁이나 충돌을 일으키고 싸움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도전할 목표 (challenging goal)로 묶여 있지 않은 이유 매문입니다. 그들이 서로 다투고 있는 동안은 교회의 비전이나 목표를 잃어버리고 있는 시간입니다. 또한 서로가 필요를 느끼지 못하거나 함께 해야 할 이유가 없을 때 서로를 돕거나 하나가 되는 연합을 원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의 성도들은 서로가 다른 부분들이 있지만 서로 조화와 일치와 화합과 연합을 통해서 하나를 이루는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목표가 성취될 때 서로가 기뻐하며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즐거워해야 합니다.

SCC는 교회를 새롭게 짓기 위해 헌금을 할 때 목표보다 헌금이 더 많이 나왔던 날 서로가 손을 맞추며(high-fives) 모든 사람들이 얼싸안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서로가 믿음으로 희생한 것에 대해 일치를 이루며 축하를 한 것입니다. 교회는 일치를 이루는 서로의 하나 됨이 있어야 교회가 성장을 합니다.

마태복음 19:26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성장은 얼마든지 믿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정말 목사나 성도들이 하나님이 크신 것처럼 큰일을 시도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떤 비전을 이룰 것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목사는 먼저 믿음으로 교회 성장을 이룰 수 있는 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물위를 걷는 사람은 12명의 제자나 무리 가운데 오직 베드로 한 사람입니다.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교회 성장을 시도하고 도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비전을 주셨다면 당신은 반드시 믿음으로 그 비전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어떤 기술이나 지식을 의존하기 전에 최우선은 믿음으로 하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거대한 산을 옮깁니다.

6. 하모니-Harmony

 

교회 성장의 방해물은 충돌(conflict)입니다. 목사와 장로, 목사와 집사, 장로와 장로, 집사와 집사의 대립은 교회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교회 성장은 서로의 일치와 융화에 있으며 하나 됨에 있습니다.

1) 연합된 리더십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a united leadership)

교회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장로들의 연합(핵심그룹)입니다. 그들의 연합은 교회의 생존과 목회의 성공과 교회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SCC도 초창기에는 목사와 장로의 대립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장로 중의 하나는 10페이지에 달하는 부적절한 문서를 만들어 다른 장로들과 목사에게 보냈습니다. 그 문서는 목사와 다른 장로들에게 동의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교회의 리더들 그룹이 목사의 리더십이나 다른 교회의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비난을 하면 교회는 이미 흔들리고 위기를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때로 장로들이 목사와 가까웠다가 어느 날 멀어지고, 목사를 좋아하다가 갑자기 싫어하며 목사를 지원하던 모습이 사라지는 경우에 목사는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목회를 해야 합니다. 러셀 목사는 SCC에 부임한지 4년이 지날 때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충돌에도 불구하고 생존하기 위해 도전의 시간과 성장의 기회를 잃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다고 했습니다.

SCC도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교리의 차이(doctrinal difference), 절제되지 않는 자만(egos out of control), 성품의 충돌(personality conflicts), 리더십에 대한 무시(disregard for the leadership)로 일치와 융화를 이루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러셀 목사는 이런 상황들을 서로 일치하고 회복하고 고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관계(relationship)를 위해 노력을 했다고 했습니다.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대립과 분열의 전쟁으로부터 균형의 하모니를 이루는 것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피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라도 리더그룹들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일치된 리더십을 갖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목사는 분열과 적대 관계를 갖지 않도록 교회의 리더 그룹들을 점검하고 살펴야 합니다.

2)                                           

   (God blesses harmonious churches)

예를 들어 예배 중에 서로 인사를 하게 될 때 서로 따뜻하게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와 자리를 앉을 때 회중들과 거리를 두고 멀리 아니면 아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사람들 옆에 앉습니다. 서로가 융화되거나 일치를 이루지 못한 교회 즉, 논쟁하는 교회(a bickering church)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 하십니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자는 서로 이간하는 자(잠 6:19)입니다. 몸(교회)을 헤치는 자나 나누는 자를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서로 융화하고 조화를 이루는 교회는 성령께서 넘치는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이 임재하는 교회입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이 바로 모두가 함께(all together)했을 때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행 2장). 사도행전 2장 44, 46절, 두절에 무려 3번이나 함께 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믿는 자가 함께 했고, 날마다 함께 만났고, 함께 먹었습니다. 그들은 늘 함께한 지체 공동체로 하모니를 이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간구하셨던 내용이 무엇입니까? 기적을 베푸는 능력을 구하셨습니까? 능력 있는 설교였습니까? 음악이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께서는 하모니(harmony)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21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나 되는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대립하고 서로를 허무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눅 11:17). 바울 사도는 말하길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는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고 서로 일치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분열은 복음전도를 방해하고 무효화시킵니다. 교회가 서로 싸움을 할 때 성장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리더와 회중들이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리더는 그들을 신뢰하고 믿으며 대화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 되는 축복을 받아야합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연합하고 통일을 이루는 것이 약하기 때문에 항상 노력하는 모습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교회는 목사와 교회의 리더들과 회중들이 융화 하며 조화를 드러날 때입니다. 분열과 비판은 리더십을 깨뜨리고 교회를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서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서로를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false teaching)

대부분 교회 연합을 위협하는 잘못된 가르침은 성경의 원리를 부인하는 진보신학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 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29-31) 이렇게 잘못된 교사는 회중들을 나누고(divide) 진리를 왜 곡(distort)합니다.

초대교회는 자주 잘못된 교사로부터 위협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5:1-2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에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고 다툼과 변론으로 인하여 초대교회가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잘못된 교리 즉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해석했던 것들은 초대교회를 나누고 협박하머 지도자들이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게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곧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2절). 그리고 답변이 왔는데 27절에서 31절에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는 치유 받은 교회를 볼 수 있습니다.

하모니(연합)는 교회를 부흥시키고 교회 성장을 유지하게 하는 핵심입니다. 잘 가르친다는 것이나 바른 교사는 교회를 하나 되게 하고 응화를 시킵니다. 그러나 잘못된 교사는 교회를 위협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킵니다. 성장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우리들을 나누게 하는 위협의 요소가 있는지 확인해서 고쳐야 합니다. 교회가 성장할 매 반드시 나타나는 질병 중의 하나가 당을 짓고 몇몇이 그룹들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불평과 리더에 대한 비난이 그곳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모니를 강조하고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기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legalistic spirit)

진보나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바꾸고 변화시키자고 한다면 율법주의자들은 어떤 것도 변화되는 것을 거절하는 자들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기와 다른 의견 차이(disagreement)에 대해서 관대한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변화 제안이나 시도에 대해서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주의자들이 자주 혼동하고 어려워하는 것은 방법(method)과 메시지(message)의 기준차이입니다. 그들은 변화의 방법을 메시지의 자유로움이라고 보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제안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진리를 위한 수호자라고 생각을 하고 예전의 전통을 지키는 자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의 교회들은 변화하고 있으며 다양한 목회의 방법들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약간의 교회 변화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농구대를 하나만 세우기를 고집함-교회의 부흥을 가로막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왜 하모니를 위협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변화를 거절하는 율법주의자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롬 14:15).

그리고 로마서 14:19-21의 말씀인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는 바울은 서로에게 거리끼지 않는 관계를 통해 몸을 세우는 연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으로 지어진 교회는 서로를 넘어지지 않도록 받들어 주는 교회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서로를 위하여 버팀목으로 서있는 교회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이란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서(prima donna) 모든 이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맞추도록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빛나게 하기 위하여 조연의 역을 맡은 사람입니다. 성장하는 교회를 위하여 필요한 사람은 조연의 배역을 잘 소화해 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5:1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주의자들의 판단과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교회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자기주장입니다. 자기를 내세우는 교회는 서로가 하나 될 수 없는 교회입니다.

❉ 교회 성장을 위해 율법주의자들을 조절하는 4가지 원리

첫째,                                           

(Understand people's natural resistance to change)

갑자기 예배를 현대예배나 열린 예배로 바꾸게 된다면 회중들은 엄청난 혼란과 화를 내고 흔들리며 불편해 할 것입니다. 이미 현대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다시 전통적인 예배로 되돌아갈 때는 더 큰 위험 뿐 아니라 반란이나 폭동이나 저항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전에 물어보고 스타일을 변화시키기 전에 충분한 의견교환과 설명이 있어야 그들이 당황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아주 적은 변화도 싫어하고 새로운 것도 거부하는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는 강대상을 1센티 옆으로 옮기는데 3년이 걸린 교회도 있다고 했습니다. 만일 강대상을 현대적인 것으로 바꾸려면 얼마나 목사가 시달려야 할지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저항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도로 그들을 다루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회중들과 같이 취급하여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그들을 수용하면서 저항을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                                           

(Determine if the issue is scriptural or traditional)

율법주의자들은 성경적 본질을 그대로의 상태(status quo)로 보존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테두리 안에서 실재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성경의 근본에 고정시키고 다른 변화에 대해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변화나 목회의 방향을 바꿀 때 정말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른 핵심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전통을 지키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본질적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선택의 결정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성경의 내용들을 통해 그들의 지식과 의식에 변화를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순히 목사의 리더십으로만 밀어 붙이면 그들은 더욱 거세게 저항하든지 공격을 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성경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전통적인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발전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어야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처럼 원리원칙이나 전통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에는 리포트(report)를 통하여 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변화에 대한 청사진을 만들어 페이퍼 워크(Paper work)를 하여 보게 하고 자신이 바라는 것이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면 삽입하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일방적으로 목사가 통보를 하는 것은 이미 그들에게 대항하는 신호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셋째,                                           

(Change slowly but consistently)

약간의 변화는 큰 위험성을 줄일 수 있지만 갑자기 일어나는 전체적인 변화는 교회에 폭풍을 일으킵니다. 변화는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변화의 속도를 리더는 융통성 있게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5년 정도의 스케줄을 만들어 변화의 시기 조절을 통하여 계획성 있게 실행할 수 있습니다. 리더는 그들에 대해서 인내하며 수용하기까지 오랜 기간 기다림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시대적 요청이나 교회의 상황에 변화가 긴급할 때는 그들이 따르도록 강한 리더십도 필요한 것입니다. 변화를 줄 때는 일관성 있는 방향성을 주의해야 합니다. 적어도 한가지의 변화를 강조하면 몇 년 동안은 정착될 때까지 꾸준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성장 전문가의 통계에 의하면 1년 미만의 적용으로 인하여 사역을 실패하는 경우가 전체 목사의 85퍼센트라고 합니다. 어떤 자료이든 원리이든 그것을 적용하는 기간은 적어도 3년 이상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를 다하려는 의욕보다 한 가지라도 바르게 정착시키는 의지가 더 중요하며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일관성이란 지속성 입니다. 꾸준히 우물을 파면 물을 얻습니다. 그러나 여기 저기 우물을 판 자국만을 남긴다면 그는 물을 얻지 못합니다. 목회는 일관성이 핵심입니다. 저항하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관성과 지속성입니다.

넷째,                                           

(Realistically count the cost)

너무 빠른 변화는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자기 방어를 적극적으로 하도록 도와줄 뿐입니다. 교회가 분열되고 나뉘는 이유가 너무 빠른 변화와 함께 리더가 성급하게 결과를 보고 싶어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때로는 타협(compromise)이 필요합니다. 변화를 준다고 해서 교회를 반으로 나누면서 까지 하려 한다면 그것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짓입니다. 리더는 자신의 자존심이나 욕심을 버리는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실제적으로 자기의 소원이나 욕구만을 채우기 원하는 변화라면 그것은 결코 교회를 하나 되게 하지 못합니다. 서로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지혜와 함께 교회 성장을 위한 변화를 위하여 자기가 희생해야 할 부분들에 대해서 희생하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는 하나님을 위한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해(do great things for God) 변화를 시도하고 도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criticism)

하모니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위협들의 세 번째는 비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가장 쉽게 쪼개고 나누는 방법은 교회의 리더들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날카로운 혀(razor-sharp tongues)를 가지고 자르고(cutting), 독설(caustic tongue)을 퍼붓고, 비꼽니다(sarcastic). 그들은 비판이 얼마나 큰 손상(damage)과 아픔(Pain)을 주는지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부정적인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을 뿐입니다. 그들은 비판도 영적 은사라고 하지만 태도는 분별력이 없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5-6에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했습니다. 혀가 얼마나 위대한 지체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악한 비판(vicious criticism)은 치명적이며 치사적입니다. 그것은 교회나 사역에 있어 열성의 기를 꺾고(dampens enthusiasm), 창조성을 질식시키고(stifles creativity), 리더십의 용기를 잃게 하고(discourage the leadership), 교회의 영을 꺼버립니다(quenches the spirit of the church). 비평적 언어는 사람들을 황폐시킵니다. 그리고 문제를 더 크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탁월한 리더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때 그것을 언제 무시해야 할지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만일 목사가 모든 비판에 반응을 하게 된다면 교회는 비판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빌 코스비(Bill Cosb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하는 비밀이 무엇이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실패자가 되는 핵심은 모든 사람이 기뻐하도록 시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목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비판을 받지 않는 목사도 한사람도 없습니다. 비판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판은                                 (inevitable)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목사가 언제 나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이 기뻐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비판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어야 하겠지만 당신이 교만하거나 건방지게 보이기 때문에 오는 비판이라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비판에 대해 너무 신경과민(thin-skinned)에 걸리면 당신은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판은 몸을 나누고 하나님의 일을 위협하는 세력입니다. 비판이 교회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비판이 생기더라도 이길 수 있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Uncontrolled ego)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네 번째 위협은 자기 통제가 되지 않는 자아입니다. 오늘의 교회들이 나누어지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자만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 신분이 높아지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싸우게 되는 결과가 됩니다. 교회에서 그들의 관심은 누구에게 맡겼는가(who's in charge)에 있습니다. 이것은 신분의 상징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주의 사역을 성취하는데 걸림돌이 바로 자기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교회가 분열되는 이유가 자신을 드러내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세력다툼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는 자만에 있습니다. 그와 같은 관료적                   (red-tape)의 장애물은 결국 사람들을 교회에서 떠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교회를 위하여 헌신할까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아 만족(ego gratification)을 위한 자리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왜 많은 교회들이 정체하고 있는가? 원인을 분석해 보면 하나 또는 두 가족이 교회를 컨트롤(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교회 위에서 군림을 하고 있기에 교회는 다른 사람들이 붙어있지 못하는 것이며 주의 사역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사람이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거절하고 저항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작은 왕국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기 위하여 세워진 곳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구조를 벗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즉, 교회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자신이 밀알이 되는 구조로 변해야 합니다.

4) 하모니 되는 방법들

 (steps to harmony)

                                          

   (Keep your ego under control)

교회가 하나 되기 원한다면 교회의 리더들이 자아 통제에 대해 특별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연합하는 것은 겸손을 필요로 합니다. 교회의 리더들은 그런 태도를 해야만 합니다. 누가 교회에서 신뢰를 받든지 아니면 어떤 일을 했던지, 이런 것은 우리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들 입니다. 다만 그들이 진실로 취하고 있는 모습이 온화함(gentleness)과 인내력(Patience)과 수고(effort)가 관심사이어야만 합니다. 교회의 리더들은 거친 말(harsh words)과 성난 어투(angry tones)를 사용하여 하나 됨이나 연합을 깨뜨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이 바로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표현하다 일어나는 감정의 대립입니다. 다른 사람과 융화되려면 말에 책임을 지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자아를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에서 강조를 해도 부족한 것이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자아를 드러내면 교만이 되고 그 교만은 결국 교회를 분열시키고 공동체를 파괴시킵니다. 자아 통제를 하십시오.

                                          

   (Be flexible)

자만과 완고함은 하모니를 깨는 가장 큰 주범입니다. 그러나 겸손과 유연성은 평안을 유지하는 가장 좀은 방법입니다. 만일 아무런 변화가 없이 당신의 방법만을 고집한다면 당신도 불행해지고 당신의 주변까지도 불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연성, 융통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하모니 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교회 성장뿐 아니라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SCC가 1000명이 모일 때 주차장 부족과 예배를 더 늘리기 위해(3부) 새로운 장소로 교회가 이전하는 것에 대해서 회중들에게 묻는 투표를 했을 때 51%는 옮기는 것에 찬성을 하고 49%는 그 자리에 머물 것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중의 한사람인 에모리 코커햄(Emory Cockerham)은 말하길 ‘나는 절대 그곳의 빌딩에서는 예배를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원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젊은 세대를 위하여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생각이나 나만을 위한 생각을 한다면 교회는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러셀 목사는 94%의 이상이 참여하는 열정으로 교회를 새로 건축하였고 에머리 또한 1999년 까지 새로운 교회에서 예배드리며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기다 하늘나라에 갔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이전이나 새로운 것을 교회가 시도하는 것은 하모니를 이루는 것에 대한 위대한 본보기(a great example of harmony)입니다. 다음의 세대를 위하여 준비하는 젊은 이들에게 바톤(baton)을 넘겨주는 믿음의 통로를 만들어 주는 의식은 계속해서 교회가 하모니를 이루어가고 있는 것을 오랫동안 역사적으로 남겨주는 것입니다. 현재의 자신들을 위해서만 행복하고 그 다음 세대에서는 빈약한 교회로 남게 한다면 그것도 결국 교회를 파괴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최대한의 유연성을 보이면 공동체는 힘을 얻고 용기가 납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융통성과 유연성을 잃지 않고 늘 적용하는 교회입니다.

                                          

   (Develop a sense of humor)

하모니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은 유머 감각입니다. 잠언 17:22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웃음이 있는 교회는 성장을 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회중들이 웃음을 잃지 않는 교회입니다. 웃겨도 웃지 않고 신나도 신나는 분위기가 없다면 그런 교회는 감정이 마른 교회입니다. 그러나 감정을 움직이는 것이 그 사람의 마음가짐입니다. 마음이 떠나 있거나 멀어져 있으면 상대방의 말이 잘 들리지 않기 때문에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해도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히 마음이 차갑든지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SCC의 선언 가운데 ‘우리 교회는 많은 웃음이 있습니다’라는 웃음이 있는 교회가 성장하는 교회임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침체된 교회는 웃음이 없는 교회입니다. 슈바르츠(Christian Schwarz)는 말하길 웃음이 많은 교회는 질적인 면에서도 좋은 교회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유머가 있고 웃음이 있으면 아픔을 극복하도록 도와주고 긴장된 분위기를 편하게 해주며 괴로운 일을 직면하게 될 때 쉽게 극복하도록 해줍니다. 서로에게 웃음을 주는 유머스런 모습은 서로를 융화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교회를 웃음이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웃음이 있다는 것은 기쁨이 있다는 것이고 만족을 한다는 것입니다. 웃음이 있는 교회를 만드십시오.

                                          

   (Respect the leaders)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대부분의 교인들이 목사를 비판하는 내용들은 정책이나 목회 방침, 직원 채용, 재정관리 등 다양합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비판은 목사에게 부담과 짐을 지게 만들고 교회에 상처를 입힙니다. SCC는 두 사일로(silo, 탑 모양의 건축물) 리더십 조직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23명의 장로들은 교회를 돌보고 감독하는(oversee) 역할과 풍조(tone)와 문화(culture)를 세우는 기능을 하고, 200여명으로 구성 된 목회자들과 직원들은 감독하는 것과는 다른 매일 원리를 찾는 일에 전념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SCC는 가르치기를 장로들은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관대한 지원과 사랑을 하도록 했고 목회자들은 장로들에게 순종하며 책임감을 갖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두 그룹이 서로 신뢰하고 회중은 그들의 상호리더십(mutual leadership)에 존경해야만 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장로와 스텝과 회중의 관계에 따른 원칙을 이렇게 기준설정을 했습니다.

첫째,                                           

(The staff and congregation must submit to the elders' authority)

장로들은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하고 회중들이 그들을 따르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해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목자의 모습으로 장로들은 교회를 리드(lead)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중은 지혜롭게 따라야 합니다. 단순히 장로에게 복종하는 것이 눈먼 장님이 되어서 무작정 따르는 것이 아니고 리더로서 책임을 다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본을 보일 때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장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정결한 삶을 살고 충만한 기도를 하며 지혜롭게 결정을 하머 마음 깊이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이 실수를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The elders must trust the staff's leadership)

리더들이 회중을 이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장로들이 해야 합니다. 리더들이 창조적으로 사역하며 교회와 사람들을 위해 열정을 가지고 목회하도록 장로들은 두려움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장로들이 스텝들을 진심으로 신뢰하지 않으면 스텝들은 회중을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스텝들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장로들이 리더들의 사역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이나 방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장로들은 리더들을 믿고 신뢰하며 따라야 합니다. 교회 성장은 리더들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Avoid controversy if possible)

바울은 디도서 3:9에서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논쟁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의 문제들은 피하지 않는 지혜를 사용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들에 대해서 의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툼이나 불필요한 말다툼(quarrel)은 피해야 합니다. 교회의 융화를 깨뜨리는 적이 논쟁입니다. 논쟁은 해결책을 찾는데 도움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비생산적인 시간 낭비입니다. 바울은 논쟁을 피해야 될 두 가지 이유에 대해서 말하면서 첫째는 성취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잠재적으로 분열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논쟁(argument) 이란 디도서 3:9에 번역하기를 투쟁(strife)이라고 했습니다. 논쟁은 결국 서로의 감정과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균형이나 조화, 하나 됨을 잃게 하고(lose perspective) 사소한 일들(trivial matters)로 싸움을 일으켜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위험한 논쟁은 피해야만 교회가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서로가 투쟁을 하며 쟁취하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투쟁이란 자기의 유익을 대변하는 행동입니다. 교회는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싸움을 하는 곳이 아니라 자신이 손해 보기 위하여 싸우는 곳이어야 성경적인 교회입니다.

                                          

   (Confront divisive people when necessary)

바울이 디도에게 말하길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고 했습니다. 분열시키는 사람들은 교회의 하모니를 위협합니다. 그들은 다투기 좋아하는 정신(contentious spirit)과 잘못된 가르침(false teaching)과 부도덕한 라이프스타일(immoral lifestyle)로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기 위해 위협을 가하는 것입니다.

❉ 불화시키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첫째,                                            (confrontation).

둘째,                                            (warring).

셋째,                                            (excommunication).

넷째,                                            (repentance).

그러나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는 것보다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1에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경고했습니다. 교회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으면 교회는 큰 수술이 필요합니다. 그 수술은 교회 건강과 계속된 성장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그리고 몸을 유지하기 위한 대안이기도 합니다. 몸의 일부분이 썩으면 그것을 잘라야 몸 전체가 살 수 있습니다. 교회를 몸(body)으로 정의하는 것은 몸의 특수성 때문입니다. 몸의 일부분을 자른다는 것은 엄청난 아픔이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죽는 것보다는 훨씬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교회를 의도적으로 가르고 불화시키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느 경우는 그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목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가 계속해서 성장하려면 승리하는 영혼과 변화된 삶과 하모니를 유지해야 합니다.

                                          

   (Practice servant-hood)

교회의 하모니를 유지하게 하는 최고의 방법은 회중들이 그들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의식입니다. 교회를 깨뜨리는 가장 큰 위협은 자아입니다. 겸손한 자세로 종이 되길 실천하는 것이 하나 되게 하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다락방에서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물고 다투며 누가 가장 중요한 사람인가 그리고 왕국에서 누가 가장 힘이 있는가를 위해 전쟁을 벌였습니다. 누구도 서로의 발을 씻겨준다든지 사랑하는 표현을 하지 않고 자기중심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종이 되어 그들의 발을 씻겨주었고 서로 발을 씻기도록 하셨습니다(요 13).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좋은 성품이나 겸손한 모습으로 하다가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비판하게 됩니다. 만일 사람들이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를 하고 섬긴다면 교회는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교회에 문제가 자주 일어나는 것은 사람들이 봉사하는 시간이 적기 때문이며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은 일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일하지 않는 종은 게으르고 게으르면 자연히 불평이 생깁니다. SCC는 회중들을 쉬지 않도록 일하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다양한 사역들을 통하여 모두가 일하는 교회이기에 불평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교회 성장은 바로 ‘일하는 종’이 되게 하는데 있습니다. 논쟁하는 사람이나 자신의 지식을 넓히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섬기는 일에 약합니다. 섬김은 교회에 하모니를 줍니다. 서로를 하나 되게 하고 결합을 시켜줍니다. 종은 일할 때 쓰임을 받습니다. 교회는 일하는 곳이며 일하는 종들이 있어야 수확을 거둘 수 있습니다. 당신의 교회가 진실로 성장하기 원한다면 성도를 ‘일하는 종’으로 만들어야만 합니다.

                                          

   (Be quick to forgive)

사역을 할 때 목사는 완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어떤 리더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리더는 실수(blunder)를 할 때 용서를 구하는 것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용서를 구하면 사람들은 그를 도와주고 책임을 나누고 지원해 줍니다. 가장 가치 있는 일 중의 하나가 ‘                   ’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비결은 실수를 할 때 빨리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입니다. 아무리 큰 실수나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피하거나 변명을 늘어놓고 자신을 방어하려 한다면 사람들은 집요하게 그 잘못을 파헤쳐 분열을 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빨리 구한다면 누구나 그를 위로하고 오히려 용서해 줄 것입니다. 교회는 용서가 있는 곳입니다. 주님은 가장 심한 죄악까지도 용서를 해주셨습니다. 주님을 닮은 교회는 주님의 사랑을 받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가 기쁨으로 즐겁게 섬기는 곳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성숙(maturity)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즐겁게 만들어 줍니다. 주님 안에서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더욱 더 교회를 융화시키고 하나 되게 하기 위하여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분열시키고 나누고 위협하고 공격하는 것은 미숙(immaturity)한 것입니다. 미숙한 사람들이 많은 교회는 성장을 할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22에 성령의 열매는 평화(Peace)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모니를 이루기 위하여 서로가 평화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가 평화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성숙에로의 싸움을 쉬지 않고 계속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세우는 원리는 하모니입니다.

7. 참여(Participation)

 

교회 성장원리의 일곱 번째는 참여(Participation)입니다. 교회는 사역 기능에 의해서 건강한 교회이고 성장하는 교회인가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목회는 사역을 의미하며 사역의 에너지나 자원이 부족할 경우 교회는 대체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작은 교회인 경우는 목사가 혼자서 모든 것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좀 더 교회 사이즈가 커지면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목사가 해야 될 사역들을 충분히 대신해서 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사람들의 믿음이 자라고 교회가 해야 될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일(task)과 사역(ministry)은 다릅니다. 일은 관리적 차원이라면 사역은 생산적 차원 입니다. 목양은 생산적 사역이고 목자목회는 양을 기르고 양을 돌보며 생산을 위한 구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짓는 것은 열매를 거두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사역을 통하여 생산과 열매를 만들어 내야 하기에 성도는 사역자(일꾼)가 되어야 하 고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합니다.

1) 왜 모든 사람들이(every member) 사역자가 되어야하는가?

복음을 향상 시키는 중요한 핵심 중의 하나가 교회를 위하여 전임사역자들(Paid staff)이 직무를 감당하며 사역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보다 개개인들을(individuals) 통하여 사역을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신악성경에 의하면 교회 리더십의 목적은 교회의 모든 일들을 하라(to do all the work of the church)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서로 사역자 혹은 구비자(equipper)가 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기록하기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 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고 했습니다.

위의 말씀에서 리더의 직무는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의 역할을 말하는 이유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목사는 또 목사를 만들고, 목사는 교사를 만들고, 목사는 복음 전하는 자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들이 교회에 있어야 교회가 세워지고 성도들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그런 구비자(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명으로 준비된 사람)가 있어야 교회는 생산적 사역을 할 때 인적자원을 지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오직 제사장들만이 일정한 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의나 제물을 드리는 행위는 오직 제사장들이 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아가심으로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고 모든 “예배 자들이 그곳에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목회자와 평신도의 사이의 구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역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제사장입니다. 베드로전서 2:5에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했고, 9절에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말하길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1:5-6)이라고 각각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제사장이고 그 제사장은 특별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사역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약적인 개념에서의 제사장은 반드시 예복을 입고 하나님이 일정하게 성전 사역을 하도록 구별시켜 놓은 사람입니다. 오늘도 제사장으로서의 성도는 사역을 위하여 부름은 받았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구원의 개념에서의 제사장 차원을 넘어 사역자로서의 제사장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을 하도록 하는 차원에서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역자이며 구비자이며 제사장이며 생산적인 일꾼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역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Involvement maximizes your church's potential)

적은 교회는 목사나 소수의 자원자들이 항상 자신들을 위하여 일하는 경우가 많을 뿐더러 나머지 부분들도 직접 감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리더들이 자주 기진맥진하고 지쳐 버립니다. 만일 리더들이 다른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일하도록 동기부여를 주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계속해서 그런 ‘지침현상’이 교회를 덮고 있게 됩니다. 러셀 목사는 초창기의 교회 사역을 하면서 조직 구조를 피라미드(Pyramid) 형식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하는 사람만 일하고 전혀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 서로 일하는 서클(circles) 시스템을 도입하여 각자 직능을 통해 다른 사역을 하도록 배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피라미드 구조는 제한적인 구조이지만 - 소수가 일함, 수동적, 일인 중심 - 서클 구조는 확대 구조로 - 모두가 일함, 능동적, 네트워크 -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러셀 목사는 두 구조의 설명을 예를 들어 말하길 “목사님, 나는 당신이 정말 좋습니다”라는 말과 “목사님, 나는 교회가 정말 좋습니다”에서 어느 쪽의 말을 듣는 것이 훨씬 좋은 것인가? 피라미드 구조는 사람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라면 서클 구조는 교회 자체에 관심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얼마든지 사역에 참여할 사람들이 많이 숨어있습니다. 목사는 그들을 찾아내는 즉 잠재력을 찾는데 높아야 합니다. 매년 교인들의 상황을 점검하머 사역자를 찾아내는 일에 몰두해야 합니다.

                                                                 

   (Involvement enhances each person's spiritual growth)

교회는 사람들에게 봉사와 섬김의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교회 사역의 한 부분에 누구나 참여시키는 것은 그들을 계속해서 성장하도록 도와주게 되는 것입니다. 리더는 사람들을 모집하고(recruit), 훈련시키고(train), 활력 있는 회중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좋은 리더는 자기 자신만이 열심을 다해 일하는 것뿐 만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모집하고 훈련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교회는 성도들이 영적 성장을 개발 하도록 특별한 커리를 갖고 있는가? 각각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섬기고 영적 은사들을 사용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도록 하는 최고의 방법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역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각자 교회 사역을 하는 한부분이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역을 할 때 신앙이 자랍니다. 힘들고 어렵고 훈련을 끝내기까지 많은 곤경이 있으며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영적으로 단단해지고 성장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 사역에 참여를 하지 않으면 영적 성장을 기대 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에게 목사가 사역하도록 권장하지 않고 훈련을 시키지 않는다면 그는 성도들의 영혼을 파멸시키고 있다는 경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사역에 참여하는 것은 교회의 성장이나 하나님 나라의 확장 뿐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자라도록 만듭니다.

2)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many members)을 어떻게 참여시킬 수 있는가?

                                                                 

   (Offer o spiritual gifts class)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 은사를 받았습니다. 한 사람도 영적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발견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영적 은사를 주신 목적은 사용(use)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사용하고 있지 않을 뿐더러 은사의 활용도가 낮다는 것입니다. 만일 봉사의 은사를 받았다면 봉사해야 하고, 가르치는 은사를 받았으면 가르치는 사역을 해야 하며, 격려의 은사를 받았으면 다른 사람들을 격려해야 합니다(롬 12:6-8). 리더인 목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 자신의 영적 은사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새들백 커뮤니티 처치(Saddleback Community Church)의 목사인 릭 워렌(Rick Warren)은 말하길 ‘하나님은 나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것.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에게 하나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 만일 당신의 은사를 당신이 사용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나에게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나의 은사를 내가 사용하게 된다면 나는 당신을 빼앗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SCC는 정기적으로 매 년에 3번 내지 4번에 걸쳐 4시간짜리 ‘당신의 은사를 발견하라’(Discovering your spiritual gifts)는 코스를 전교인을 대상으로 실시도 하지만 특히 새신자에게 실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코스는 단순히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영적 은사들의 종류들만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품 프로파일(personality profile), 영적 여정(spiritual journey)을 기록하고, 은사의 열정(spiritual passion)을 확인하고, 그들 자신의 영적 은사를 발견하는 시험(test)을 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은사를 발견하는 코스를 실시하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을 했습니다. 첫째는 사역을 더 효과적(more effective)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고, 둘째는 사람들이 사역을 하다가 지치는 기회(the chance for burnout)를 매우 감소(greatly reduced)시켜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목사는 성도들이 은사적 삶을 살도록 은사를 먼저 발견해 주는 사역을 반드시 실천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봉사에 열정이나 피곤을 느끼게 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사)로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사로 사역을 하면 열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은사 훈련을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합니다. 매년 특별한 기간을 설정(6월이 좋음)하여 성도들이 사역을 할 때 무엇을 통하여 하고, 무엇에 의해서 해야 할지를 알게 하며 그 영적 은사의 활용을 어느 정도 열정을 가지고 헌신하며 열매를 맺고 있으며 교회에 유익을 주고 있는지 확인을 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사의 목적은 사용입니다. 은사로 사역을 하도록 역할을 찾아주어야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그가 받을 상급이 있습니다.

                                                                 

   (Have an annual volunteer recruitment event)

SCC는 매년 6월에 2-3주 동안 ‘                                 ’(a volunteer recruitment day)을 실시하면서 자원자들을 세워가고 있습니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머 특별한 설교를 준비도 하여 동기 부여를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기도의 시간도 갖고 매년 헌신할 수 있도록 예배나 사역을 위한 지원 카드를 쓸 수 있도록 격려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역을 할 때 언제나 주 관심사는 봉사자가 될 수 있도록 연결 시켜주는 것(contacting)과 지원하도록 하는 것(enlisting)과 훈련하도록 하는 것(training)에 역점을 둔다는 것입니다. 지원자들을 모집하는 날을 갖는 것은 교회나 개인에게 4가지 분명한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첫째,                                                    

(People realize the need)

모든 사역에는 많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사역을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합니다. 많은 교회들은 80%의 교회 일을 20%의 사람들만이 하기 때문에 그들은 너무 일을 많이 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교회-평신도 사역자가 일하는 교회-가 건강하고 성장할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단 한 번에(recruitment day) 얼마나 봉사하는 사람들이 필요한지 알려주고 그들이 교회의 필요에 책임을 느끼도록 하기 때문에 봉사자 모집의 날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원하도록 하는 필요를 느끼게 해줍니다. 

둘째,                                                        

(Volunteers can choose the ministry that best utilizes their gifts)

그들이 봉사할 수 있는 기회의 영역들을 한 번에(recruitment day) 보고 그들의 은사에 알맞은 사역을 더 쉽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교회에서 필요한 종류의 봉사할 부분들에 대해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교회를 사역하는 교회로 바꾸는데도 유익을 주게 됩니다. RD는 사역의 리스트들을 보여주게 되고 교회에서 어떤 사역들이 있는가를 발견하게 하며 자기의 은사에 맞는 사역에 최고의 사역자가 되도록 도와주게 됩니다. 

셋째,                                                           

(Volunteers ore more likely to commit to a one-year ministry)

교회의 리더들이 자주 실수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일에 지원하기 위해 도전을 할 때 무엇을 기대하는지 명확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한 가지 일에 몇 십 년을 무작정 봉사하게 한다면 그는 역동성이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은 열정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원자의 날에 기회를 주어 자신의 은사에 맞는 일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더욱 유망한 일이나 가능한 일을 할 수 있는 유익을 주게 됩니다. SCC는 같은 일을 봉사할 때는 반드시 본인에게 의사를 묻고 재 헌신하는 기회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들이 절대로 필요로 하고(need) 더 즐겁게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일 년 후 봉사를 마칠 때는 그들이 책임을 다했는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도 체크를 해야 합니다. 자원자의 달은 그들이 더 유망한 일에 봉사할 수 있도록 유익을 줍니다.

넷째,                                                            

(The entire congregation gets involved)

자원자 모집의 날(Recruitment day)은 각 부서의 정보에 관하여 전체의 회중들이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어떤 것을 성취하기 위해 재정적인 지원 운동(a fund drive)과 출석 추진력(attendance drive)과 같은 일들을 통하여 회중의 연합 운동에 노력하도록 합니다. 특히 새로운 사람들이 이런 기회를 통하여 사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익을 줍니다. 교회의 사역은 모든 성도의 참여로 이루어질 때 건강합니다. 사역의 소외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관찰을 해야 합니다.

                                                                  

(Offer different levels of responsibility)

여러 가지 헌신의 수준과 책임의 다양성을 자원자들이 알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의 새로운 회원이 되면 봉사하려할 때 교회의 필요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 입니다. 새로운 가족들은 교회에 대한 일부분만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성공적으로 은사를 활용하거나 최고의 봉사를 위해서는 그들의 필요에 대해서도 교회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부서는 여러 가지의 수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교회의 필요와 회중의 필요를 잘 확인하여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역의 필드입니다. 그러므로 지원하는 사람들도 다양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Recruit qualified people for leadership)

만일 봉사자들이 무자격자나 헌신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교회 사역은 물론 자기 자신과 자신이 맡고 있는 사역과 전체 공동체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사람들을 사역에 참여시키기 전에 리더는 분명한 목적을 제시하고 활동적인 사역이 되기 위한 목표까지도 분명하게 알려주어 사람들이 지원하도록 해야 합니다. 사역에 온 회중을 참여시킨다고 해서 무작위로 사역 배치를 한다든지 목적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위를 부여하게 되면 사역은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사역은 어떤 것은 유능한 스킬을 필요로 하는 것도 있으며 높은 자질과 영적인 자격이 근본적으로 따라와야 될 분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탁월한 성품이나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력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사람들을 선별할 때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역에 맞는 봉사자를 찾아 알맞은 자리에 배치를 하는 교회입니다. 리더는 성도들을 많은 사역에 참여시키는 열린 목회의 다양성을 추구해야 하지만 적당한 봉사자를 찾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Release the responsibility)

자격을 갖춘 사람은 적절한 곳(in place)에 있는 사람입니다. 직무를 성공적으로 위임한다는 핵심은 책임을 위임(delegation)하는 것입니다. 자원자들을 효과적으로 훈련하고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그가 맡을 일을 실행할 때 정확하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배회하거나 방황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만일 리더가 그 사람에게 책임을 완전하게 주게 되면 질적인 자원자는 리더가 했던 것보다 자기의 직무를 더 잘 할 수 있게 될 것 입니다. 그들이 사역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게 되면 월급을 받고 일하는 스텝들보다 더 일을 충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봉사자들이 자신감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러셀 목사는 워십팀(worship team)에게 예배 시작 후 30분 동안 그들이 찬양을 선곡하는 것이나 간증을 하는 것, 드라마를 하는 것에 대해 전혀 관여하지 않고 책임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자신의 것으로 - program 여기며 창조적이며 열정적인 모습으로 사역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자원봉사자들은 월급을 받는 스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원하여 일에 참여한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책임감을 묻거나 질타를 하고 모든 것이 담임목사의 반응대로 움직이도록 묶게 되면 그들은 쉽게 지치고 일에 대한 의욕을 잃게 됩니다.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도 리더의 지혜로움 입니다. 다만 자원봉사자들이 자신이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면 그들은 최선을 다하여 일하게 될 것입니다. 자원자들은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너무 무거운 짐을 져 주는 것은 스스로 일을 놓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Encourage the workers)

목사는 자원봉사자들이나 스텝들을 탁월하고 진실하게 격려하는 것을 유지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격려 받는 것을 사랑합니다. 좋은 리더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주어이 그들이 신이 나서 일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첫째,                                                           

   (Talk about them positively)

사역자들을 격려할 수 있는 방법들은 설교할 때나 격려 노트(Encouraging note)나 주보나 교회 뉴스레터(newsletter), 스텝의 미팅이 있을 때 흐뭇할 정도로 격려의 말을 적극적으로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런 격려는 다른 사람들에게 일할 수 있는 의욕을 불러 일으켜주는 탁월한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당신의 격려는 순종을 하게 합니다. 리더의 효과적이며 진정한 격려는 3가지를 잘해야 하는 자격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 격려는 일반적(general)인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것(specific)으로 해야 합니다.

      특별한 격려를 할 때 당신의 팀 멤버들은 탁월하게 일하며 미래에 더 노력하도록 용기를

      주게 됩니다.

  둘, 격려는 비위를 맞추는 것(flattering)이 아니라 정직(honest)하게 해야 합니다.

      리더가 의미가 없는 말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격려하는 말과 아첨하는 말을 지각이 있

      는 사람을 압니다. 그러므로 정직하게 격려해야 합니다. 

  셋, 격려는 끊임없이 하는 것(incessant)이 아니라 기회 있을 때 이따금씩(occasional)

      해야 합니다. 

항상 같은 말이나 일상적인 방법으로 격려하거나 똑같은 표현으로 한다면(설교가 좋습니다, 노래를 잘하십니다, 고생이 많습니다) 그것은 격려가 아니라 오히려 욕지기나게(nauseous) 만드는 일이 됩니다.

둘째,                                             

   (Prepare them properly)

봉사자들이 철저한 훈련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쉽게 좌절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리더는 그들에 대해서 기대를 갖고 있음을 정기적이며 규칙적으로(regularly) 의사소통을 통해서 확인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효과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고유의 본분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셋째                                                            

   (Reward them generously)

리더가 봉사자들을 놓여주지 않을지라도 창조적인 일에 대해서는 보상을 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기쁘게 봉사를 하는 것은 보상의 격려가 하나의 방법입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보상은 그들에게 활력을 주게 됩니다. 보상에 대한 예산을 준비하여 관대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봉사자들을 위한 연회(banquet)나 저녁식사(dinner)를 때때로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들을 기쁘게 해주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서로를 위하여 격려하도록 해야 합니다.

러셀 목사는 말하길 교회가 빠르게 성장하려면 교회의 리더나 성도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                                    ”(a mile wide and an inch deep)라는 교회가 크게 자라도록 하는 교회의 비전은 넓게 하고, 모든 성도들은 영적으로 자라도록 해야 하는 개인을 위해서는 세밀하고 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SCC는 그런 이유 때문에 거의 4000명의 사역자들이 사역에 참여하며 역동적으로 일한다는 것입니다. SCC는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Paid staff) 하는 일보다 훨씬 많은 일들을 자원들이(unpaid staff) 효과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교회의 멤버 중의 한 사람이 그를 위하여 기도노트를 만들어 기도하고 그에게 수술이 잘되도록 격려의 편지를 보내고 하는 일은 자원봉사자들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막을 수 없는 힘이 계속되도록 SCC는 계속해서 일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장은 ‘                     ’(unstoppable force)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멤버, 목사, 봉사자가 각자의 사역 영역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해내는 교회입니다.

8. 교제 - Fellowship

 

건강한 교회(healthy church)는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세상의 어느 곳에서보다 더 탁월하게 발견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랑을 주고 받는 곳입니다. 교회는 서로가 함께 하는 곳입니다. 성도들이 아픔을 당하고 갈등과 상처를 입고 깊은 절망으로 신음할 때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나눔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됨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어느 경우 교회에서 벌어지는 슬픈 이야기는 갑작스런 사고나 사건을 성도들이 당하게 될 때 교회가 외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성도들 간의 관계는 문제를 대처하는 대응 행동에 따라 깊은 교제권을 갖고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빠르고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성도들이 많다면 그 교회는 교제권이 잘 세워진 교회이지만 게으르고 소극적인 자세로 행동을 한다면 그 교회는 서로의 교제가 자연스럽지 못한 교회일 것입니다.

1)                                                         

   (Stronger than our diversity)

하나님은 사람들이 서로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하길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3-7)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믿는 자들의 공통의 목표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신앙의 바른 길을 가려면 주님과 성도, 성도와 성도가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과의 교제는 가장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라이프스타일입니다.

매일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평범한 것입니다. 주님과 교제한다는 것은 함께(together)하는 것입니다. 같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동반자가 되는 것입니다. 12제자는 특별한 그룹입니다. 시몬은 열심당원(Zealot)으로 로마 정부에 반항한 사람입니다. 마태는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사람(a tax collector)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협력자(collaborator)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적대감을 갖고 있는 적과 같은 사이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도마와 베드로도 서로 반대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베드로는 충동적인(impulsive) 사람이고 다혈질 성품(sanguine personality)의 사람이기에 쉽게 믿고 자주 흔들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우울증 환자처럼 수심에 잠긴 (melancholy) 사람이고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thinker)이기에 반응이 늦지만 깊게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서로 연합하기에는 성품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때때로 서로가 기력을 잃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서로 섬기기 위해서 자신의 자아를 희생시키는 동기부여를 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0:25-28까지를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제자들이 서로 팀 멤버 중에 누가 가장 중요한 사람인가에 관하여 다툼이 있을 때 주님은 큰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서로가 섬김의 자세로 교제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12제자들은 교회의 작은 세계(microcosm)와 같은 곳입니다. 교회는 서로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SCC는 늙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 부자나 가난한 사람, 건강한 사람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 백인과 흑인, 미숙한 신자(baby christian)나 성숙한 신자(mature christian)나 서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자세를 가지도록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부름 받았음에 동일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려 준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4에서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특별하게 강조하는 것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교회에서 서로가 물고 뜯으며 치열한 전투를 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서로가 다른 배경과 성품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교회 안에서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길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크리스티안 슈바르츠(Christian Schwarz)는 교회 성장의 자질을 말할 때 사랑의 관계(loving relationship)가 꼭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성장하는 교회의 높은 점수는             (love quotient)가 높다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사랑,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랑 표현, 사랑의 높은 관계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사람들이 진실로 원하는 것은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을 체험하게 하는가에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맺어진 끊을 수 없는 관계로 세워진 곳입니다. 

초대교회는 교제에 대해 탁월한 교회였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레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 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머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2-47). 초대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원인은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성도들이 어떤 그룹에 속하게 될 때 서로가 즐거움을 주고 기뻐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그룹이 깨어지고 교회가 나누어지며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사랑의 관계에서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작은 교회는 교제나 관계에서 더 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모두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을 하지 않으면 머무는 것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교회가 작다고 해서 사랑의 교제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서로가 사랑하고 있으며 사랑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교회가 성장하길 원한다면 서로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2)                                                      

   (The need for fellowship)

그리스도인의 교제란 우리들의 사랑을 위한 열정적인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사람들이 외로움과 싸움을 하면서 사는 세상입니다. 옆집에 사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며 점점 옆집과 담장을 높이 쌓아 서로에 대해 더 멀어지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교회가 한기(coldness)를 느끼게 하는 교회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교회가 탁월하게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곳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고 했습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교회가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기독교(Christianity)는 에스(yes), 그러나 교회교(churchianity)는 노우(no)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기독교는 인정을 하지만 교회는 왜 반대를 하고 적대감을 갖습니까?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해야 될 것을 하지 못하고 본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대를 거는 만큼 교회들이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적을 잃게 되면 교회가 필요 없다라는 말을 세상 사람들에게 듣게 됩니다. 교회는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일 때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똑똑하고 잘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세워진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사랑하는 연습과 실천을 하도록 세워진 곳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제(fellowship)가 필요한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과 교제를 통해서 그들의 믿음이 자라도록 책임 있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이 이러한 옵션에 의해서 말하도록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내가 몸의 일부라는 교회에 대한 신앙을 모르고 하는 행동입니다.

성경은 말하길 교회는 주님의 몸(the body of Christ)이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는 것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서로가 붙어있는 몸이기에 자신의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몸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2:12-27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 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바울은 당신 자신에 대한 애착보다 몸의 한 부분으로서의 애착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몸을 이루기 위한 각 지체의 역할을 말하면서 바울이 사용하는 용어들은 이렇습니다. 아름다운 지체, 부족한 지체, 여러 지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몸의 어느 부분이라도 고르게 사랑하고 서로 필요로 하는 것이 건강한 몸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어야 회복이 가능합니다. 외부에 선교를 하고 이웃을 돌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먼저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 한 몸(one body)을 이루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만일 몸이 위협을 받는다든지(scar) 결점이 생긴다든지(blemish) 불충분(inadequacy)하다든지 하면 그 몸은 마비(Paralysis)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몸의 한 부분으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는 결과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교회는 몸으로서의 역할을 지체들이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에 의해서 건강한 교회인가 아니면 허약한 교회인가를 말해줍니다. 성도들이 서로의 필요를 느끼고 서로가 몸으로서의 생명을 유지하며 도움과 연결된 사랑의 네트워크를 갖고 있을 때 주님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제의 본질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의 교제란 어떤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 아울려 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 이상입니다.

신약 성경은 교제(fellowship)를 명령하면서 서로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세밀한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 로마서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 로마서 12: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 로마서 15:7 서로 받으라(Accept one another)

✚ 로마서 15:14 서로 권하는 자(Instruct one another)

✚ 로마서 16:16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 고린도전서 1:10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 갈라디아서 5:13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 에베소서 4:2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에베소서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

✚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 에베소서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 골로새서 3:13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 골로새서 3:16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 데살로니가전서 5:11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 데살로니가전서 5:13 너희끼리 화목하라

✚ 데살로니가전서 5:15 오직 피차‥‥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 히브리서 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머

✚ 야고보서 5:16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 베드로전서 1:22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 베드로전서 3:8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 베드로전서 4:9 서로 대접하기

✚ 베드로전서 5:5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얼마나 서로 관계를 세우고 서로 규칙적으로 교제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가? 이 세상은 낙담시키게 하는 장소일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채팅과 마약과 탐욕으로 얼룩져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언젠가는 자신이 홀로 있음에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교제하면 홀로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마치 엘리야가 낙심을 하면서 자신이 홀로라며 하나님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했습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 19:14).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다가와 그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엘리야에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하나님은 무려 7000명을 엘리야 곁에 두시겠다고 했을 때 엘리야는 새로운 뉴스에 재다짐을 하면서 자신의 임무를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의 실수나 잘못들을 꼬집어 상처를 주는 곳이 아니라 서로가 문제들을 감싸주며 사랑을 하는 곳입니다. 서로에게 짐을 지우며 고통스럽게 교회 생활을 하도록 만든다면 사람들은 교회에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교회의 멤버들이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들은 오래 가지 않아서 우리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서로가 교제를 하는 순종이 필요하며 성장하는 교회가 되려면 교제하는 교회가 되는데 온 정열을 다 쏟아야 합니다. 교회는 교제가 살아있어야 혼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서로라는 단어를 깊이 관찰하고 실제로 우리 회중들은 지체들과 교제를 하고 있으며 교제를 필요로 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3)                                           

   (Three circles of fellowship)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다른 믿음의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가능한 한 관계를 세우고 교제를 위한 많은 기회를 창조해 내는 것이 교회가 해야 될 임무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3가지 다른 수준의 관계들을 사람들과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아는 사람들(acquaintances)로 사회적으로 인사 정도를 하며 지내는 사람들의 그룹입니다. 둘째는 친구들(friends)로 이름 정도나 가끔씩 시간을 같이 보내 는 사람들의 그룹입니다. 셋째는 동지들(companions)로 매우 가까운 사이로서 가족의 일원이나 동반자, 친우의 그룹입니다. 대개의 경우 수적으로 계산을 한다면 가장 많은 사람들은 아는 사람들이고, 그 다음은 약간의 친구들, 그리고 중요한 시간을 같이 보내는 동지는 정말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3종류의 관계는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교제의 3가지 서클이 있습니다.

                                          

   (congregation)

회중은 깊은 교제를 하는 그룹이라고 하기 보다는 함께 함으로 서로에게 격려를 주는 정도일 것입니다. 마치 회중들이 예배를 드리게 될 때 더 많은 성도들이 참여를 하게 되면 힘이 나고 영적인 감동이 서로에게 더 커지게 됩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적은 수보다 많을 경우는 설교를 하는 사람이나 설교를 듣는 사람 모두에게 힘을 주는 것과 같은 초기 교제 그룹으로 불리는 것이 회중입니다. 만일 자신이 회중으로서의 위치를 지키고만 있다면 멀리서 용기와 격려를 할 수 있겠지만 깊은 교제는 나눌 수 없게 됩니다.

                                          

   (class)

교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조직으로 남녀선교회, 위원회, 성경공부 그룹이나 구역이나 속회, 적은 수가 모이는 예배, 성도의 50-60퍼센트가 모이는 훈련 모임과 같은 특별한 중간 구조에 소속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역이나 공부, 혹은 훈련을 목적으로 모이는 그룹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이런 중간 서클(middle circle)에 대해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 성장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회중이 모이는 그룹과 소그룹 구조를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성장학자인 라이너(Thom Rainer)는 말하길 뒷문을 막는(closing the back door) 효과적인 방법이나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는 방법을 사용할 때 목사들은 과거의 유행(old fashioned)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크고 작은 것만 있는 교회이지 중간 그룹들이 없기에 교회의 교제권 확보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정말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를 세워 줄 수 있도록 서로 최선을 다해 알 수 있는 도구들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쉽게 실수하고 있는 대 그룹과 소그룹의 문제들은 무엇인가? 왜 중간 그룹이 교회에서 필요하고 중요한가?

첫째.                                              

   (A natural first step)

중간 그룹은 회중 그룹으로부터 더 깊게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해 움직이도록 만드는 자연스런 첫 걸음을 뛸 수 있게 해 줍니다. 정말로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거의 서로를 알지 못하는 회중으로서 있다가 갑자기 서로를 깊이 아는 가까운 동반자가 되는 소그룹에 배치되는 일입니다. 소그룹은 서로가 많은 시간을 갖고 함께 사역을 하면 동반자 관계로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서로가 잘 알 수밖에 없는 소그룹에 참여를 한다는 것을 쑥스럽게 생각을 하고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간 그룹은 어떤 목적을 목표로 모이는 그룹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우정을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됩니다.

둘째.                                              

   (Objective Bible study)

중간 서클은 중요한 성경공부의 환경을 공급해 줍니다. 클래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으로 공부하여 성취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합니다. 그러나 전체 회중이 모이는 경우는 성경공부에 제한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듣는 사람들이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으며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상호작용하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에 소그룹이나 셀그룹은 너무 주관적이기에 유익을 주는 교육적인 면이 오히려 좋습니다. 마치 이드로가 모세를 격려하면서 사용했던 것이 100부장, 50부장과 같은 리더그룹을 만들어 책임을 같이하도록 발전케 한 것입니다. 이것이 중간 그룹입니다. 중간 그룹(middle group)은 이런 활동을 통해 크리스천이 알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과 기독교 교리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충분한 장소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중간 그룹은 교회에 열심을 내는 집사와 교사들이 참석하는 그룹입니다. 이런 중간 그룹의 모임이 주중과 정기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셋째.                                               

   (Opportunities for ministry)

SCC의 경우 장년성경교제(Adult Bible Fellowship)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전체의 50%가 넘는다고 했습니다(45ABF). 사이즈는 50명에서 200명까지 참석할 수 있는 클래스입니다. ABF는 작은 회중이 모여 활동하는 것으로 기도를 서로 같이 하고, 병자들을 방문하고, 재정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사역들을 합니다. 모두가 목사처럼 열정으로 사역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더 깊은 교제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며 공동체를 돌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cell) 

앞에서 말한 두 그룹은 크리스천 교제의 기초에 반드시 필요한 서클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서클은 서로가 가장 중요한 사랑의 요소를 갖게 하는 하부그룹입니다. 그것이 셀입니다. 셀은 20명 이하의 모임으로 서로가 멤버들로서 깊이 아는 관계로 맺어진 책임감 있는 개인적인 지체그룹입니다. SCC는 모든 셀을 14명 사이즈로 만들었습니다. 셀은 서로가 가장 잘 알도록 하고 서로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목적으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서로가 영적으로도 깊은 교제를 나누고 성공적인 교회 생활을 하도록 문제를 해결해 주는 그룹입니다. 

월로우 크릭 커뮤니티 처지의 빌 하이빌스(Bill Hybels, Rediscovering Church)목사는 말하길 ‘진실한 교제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대변혁을 일으키는 삶을 살도록 힘을 주고 가면을 벗게 하고 대화를 깊게 해주며 상처받기 쉬운 마음을 치유하고 삶을 나누고 책임감을 갖게 하고 사랑스러움이 넘치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형제와 자매(brother and sister)가 되어 그의 어깨에는 짐을 서로 지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들이 이런 교제를 하고 있어야 교회가 성장을 합니다. 

만일 200명 이상이 모이는 그룹에서 서로 고백을 하고 짐을 나누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그룹 셀이 필요한 것입니다. 서로 지체들이 깊은 관계를 맺게 하려면 작은 셀 그룹을 만들어야 합니다. SCC는 250개의 가정성경교제(Home Bible Fellowship) 그룹과 100개의 책임 그룹(accountability group)으로 약 350개의 소그룹에 장년 50%가 헌신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그룹의 목적은 움직이는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그룹의 리더 사역자인 머피 벨딩(Murphy Belding)은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기고 서로 존경하는 등. 그것은 크리스천 라이프를 위한 청사진(blueprint)이다. 이것은 충만한 삶을 살게 하는 청사진이다. 소그룹은 서로를 내적으로 알게 하고 관계를 맺게 하는 최고의 장소이다. 그 곳은 단순히 성경공부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 돌봄의 장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소그룹은 한 주간에 그들이 참여하며 개인적인 질문들과 문제들을 치유받기에 적합한 장소입니다. 교제를 깊게 그리고 빠르게 하려면 소그룹에 참석해야 합니다. 목사는 이런 소그룹 구조 환경을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역이나 속회, 마을, 목장이라고 불리우는 활동들에 대해 새로운 원리와 전략을 통하여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셀 운동이라는 막연한 패러다임을 접목시키려는 목회에서 보다 우리 현실에 맞는 소그룹 사역을 개발해야 합니다.

❉ 구역 / 속회를 성공할 수 있는 셀 변형의 원리

① 구역원의 멤버십을 15명 정도로 할 것.

② 증식하는 구역은 자르지 않고 계속 자라도록 지원 할 것.

③ 먼거리의 성도는 잘되는 구역에 속하게 할 것.

④ 구역장은 목회적 돌봄(Pastoral care) 은사를 갖은 사람으로 세울 것.

⑤ 잘되는 구역에 예비 구역장을 파송하여 훈련시킬 것

⑥ 구역의 목적을 번식(multiplication)에 둘 것.

⑦ 구역장 모임을 매주 실시하되 교회의 원리를 가르칠 것.

⑧ 구역 멤버들을 탁월하게 돌보는 사역(care ministry)을 실천할 것.

⑨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구역은 구역장을 대치할 것.

⑩ 매 6개월에 한 번씩 총체적 평가를 할 것.

⑪ 구역의 성취 주제는 비전, 전도, 기도, 돌봄, 교제의 순서로 할 것.

⑫ 매월 목표달성을 이룬 구역을 격려할 것.

⑬ 구역장 리트릿을 분기별로 실시할 것.

4)                                                

   (Create atmospheres for relationship building)

모든 교회는 관계를 세우기 위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데 모두가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리더인 목사가 교묘하게 대화를 통하여 혹은 설교를 통하여 조작을 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관계를 가르친다면 사람들은 그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여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관계를 향상시키는 ‘환경’(atmosphere)을 조성할 수 있는가?

                                   

   (Large atrium)

예배에 들어가기 전이나 예배가 끝이 난후에 서로의 교제를 나누는 공간 즉, 큰 뜰(안마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작은 방에 들어가 서로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제한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 입구에 넓은 뜰을 만들게 되면 혼잡하지도 않고 불안해하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대화를 나누고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새로운 건물을 짓게 될 때 늘 관심을 두어야 할 중요한 장소가 바로 큰 뜰임(Large atrium)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recreational opportunities)

어떤 사람들은 오직 교회에 오는 것이 기분전환을 위한 장소로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포츠를 할 수 있는 교회를 선호하는 것이 영국이나 미국교회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이 단순히 건강이나 오락의 차원을 넘어서 서로 교제의 기회를 제공하여 준다는 사실입니다. 관계를 세워주는 레크리에이션의 유익은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 깊이 있는 크리스천 우정을 나누게 합니다. 

둘째, 육체적인 훈련은 영적 헌신을 하도록 인도합니다. 

셋째, 사역에 산소를 공급해 줍니다. 

넷째, 다른 종류의 사람들과 사귐을 갖게 합니다. 

                                      

   (Meaningful activities)

SCC는 교회사역 확장 프로그램 중에 ‘Great day of service’(위대한 봉사의 날, 1999 GDOS)를 만들어 지역을 위한 44개의 사역들을 시행하면서 100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해서 토요일에 봉사하도록 했습니다. 집들에 페인트를 칠해 주고 창문을 닦아주며 꽃을 심으며 지역에 필요한 것들을 위해 봉사를 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지역을 위하여 봉사함으로 지역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증인들로서 공동체가 함께 섬김의 기회를 갖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제를 위한 위대한 시간들을 제공했습니다. 또한 500여명의 성도들이 단기 선교 여행을 함으로 선교를 통한 기회에 동참케 하여 그들의 개인의 영적 성장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승리하는 모습을 갖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관계를 세우는데 (relationship building)에 위대한 환경을 공급해 주는 도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역 사회를 돕고 선교를 통해 어려움들을 서로 극복하면서 깊은 관계적 삶을 살도록 하는 활동적인 사역들이 교회 안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서로 활동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체험을 나눔으로 서로 깊이 알고 이해하여 도움을 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지체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5)                                                

   (Minister to the hurting)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향한 열정으로 충만한 분임을 신약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6:34에 목자 없는 양을 향한 열정에 대해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1:3에서 모든 위로의 하나님과 열정의 아버지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러한 종류의 열정이 교회에서 표현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 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몸의 일부분이 상처를 받으면 모든 몸에 영향을 미친다(affected)는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상처를 치유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상처들로 가득 찬 곳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상처를 치유하는 장소입니다. 전체 교회의 의무는 치유(healing)를 위해 열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려면 서로를 필요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눈이 손에게 말하길 나는 네가 필요 없다(I don't need you. 고전 12:21)라고 한다면 서로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손이 아프면 모든 몸이 반응을 하고 눈물이 나면 위가 쓰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온 몸이 작용을 하기 때문에 좋은 물, 기쁨의 눈물을 흘릴 때는 몸의 상태가 좋지만 슬픔의 눈물, 괴로움의 눈물을 흘릴 경우는 몸의 상태가 나빠지는 반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의 일부분이 상처를 받으면 모든 몸에 영향을 미친다 (affected)는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상처를 치유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어떤 사역이 있어야 하는가?

                                              

   (Support groups)

SCC는 사람들의 상처를 위해 사역자들이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들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4)라는 말씀을 기초로 다음과 같은 지원그룹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 AA(Alcoholics Anonymous) 알코올 중독자 치료

✻ AI-Anon(Family members &  friends of alcoholics) 술 중독자 치료협회

✻ Cancer 암으로 고생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지원

✻ Chronic pain 만성적 고통 - 가족이나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보살핌

✻ Freedom from smoking 담배로부터의 해방 - 금연을 도와 줌

✻ GA(Gamblers Anonymous)도박 중독자 치료

✻ Gam-Anon 도박 중독자 치료 협회

✻ Homosexuality 동성애로부터 가족과 친구를 지원

✻ H0PE(He Offers Peace Everlasting) 호프 - 영구적 평안을 유지 하도록 의기소침과 투쟁 하는 사람 지원

✻ Hopeful Hearts 소망의 마음 - 불모의 사람들에게 지원과 정보를 줌

✻ Learning differences 의견차이 습득 - 어린이들이 배우도록 지원

✻ Life after a death 사후의 삶-슬픔 회복(grief recovery)

✻ Love hunger 기아 사랑 - 먹지 못하는 장애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지원

✻ MS support group(For multiple sclerosis victims) 엠에스 지원 그룹

✻ Pi1ots' wives 조종사의 아내들 - 조종사 아내 연결과 교제 지원

✻ Public school educators 공립학교 교사를 위한 네트워크와 지원

✻ Rebuilders 리빌더즈 - 이혼한 사람들을 지원

✻ Restorative justice 정의 복구 - 범죄 피해자와 가족, 범죄자를 위한 지원

✻ Serenity seekers 평온구도자 - 독립할 수 있도록 단계별로 지원

✻ Sugar babes 비행 아동과 가족을 지원

✻ W0RTH(Women survivors of rape or abuse) 윌스 - 강간과 학대로부터 생존

이렇게 SCC는 다양한 지원들(supports)을 통해 교회가 사회의 고통을 함께하며 그들을 구원하고 치료해 주기 위한 사역을 전략적으로 시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SCC는 이런 사역을 하는 과정의 근거를 에베소서 4:15-16에 두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지원 그룹(support groups)의 목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룹 안에서 서로 함께 주님의 몸이 되는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benevolence ministry)

성경은 위선자에 대해 지적을 했습니다. 만일 목회자가 그들의 육체적 필요(Physical needs)를 무시하고 영적인 필요(spiritual needs)만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6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고 영적 필요와 육체적 필요의 균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역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합법적 필요(legitimate need)에 대해서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선행 사역이라고 부르는데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나 직업이 필요한 사람에게 직접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역자들이나 보조 사역자들에게 각종 혜택을 주는 것도 선행 사역의 일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Pastoral care)

교회가 적을 때는 목사가 작은 일까지 관심을 두고 돌보게 되겠지만 교회 사이즈가 커지게 되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심하게 성도들이나 그의 가족들을 케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커지면서 교회의 중요한 돌봄의 사역은 자연히 장로들이나 스텝 또는 자원봉사자 들이 양무리를 돌보는 것에 의존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효과적인 교회는 성도가 성도를 돌보는 사역으로 전환이 되어야 보다 구체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SCC가 실시하고 있는 돌봄의 사역의 종류들은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A. 카운슬링 사역(Counseling ministry)

전문적 카운슬러를 통하여 인생의 어떤 위기와 감정적 충격이나 파괴로부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사역을 교회가 해야 하는가? 첫째는 회중들이 필요로 하고 목회적 돌봄이 교회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들의 위기에 더 효과적으로 사역자가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SCC의 카운슬링 사역의 목표는 사명 선언문의 세 번째에 제시된 ‘본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라고 했습니다. 

첫째, 위기에 처한(in need) 그들에게 사역자가 되어야 하고 둘째, 사람들의 필요에 더 깊게 돌보는 사역자가 되어야 하고 셋째, 위기를 넘기도록 도움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정의 위기, 관계의 문제, 슬픔의 사건들이 계속되기에 돌보는 사역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B. 결혼 멘토링 사역(Marriage-mentoring ministry)

그리스도인 커플을 위한 사역으로 결혼에 대한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고 기독교 결혼에 대한 정보 등을 제공하며 돌보는 사역입니다. 결혼을 위해 교회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찾아주는 사역이기도 합니다. 결혼 세미나 등도 실시합니다. 

C. 파라클리트 사역(Paraclete ministry)

파라클리트는 그리스 말로 ‘곁에 오다’(comes alongside)라는 뜻으로 교회의 문화에 적응을 잘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한 믿음을 갖도록 그들 곁으로 가서 중재자로 혹은 위로해 주는 사람으로 사역을 하는 것을 파라클리트 사역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인 영적 체험과 성숙되는 신앙인이 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D. 케어 사역(Care ministry)

모든 상처가 카운슬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냥 친구가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픈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상처를 입기도 하고 외로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깨어지고 아픔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반드시 카운슬러만이 아립니다. 대화를 할 상대가 필요한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필요한 것이 케어 사역입니다. 카운슬링 사역은 깊은 문제를 처리 하는 것이라면 케어 사역은 일반적인 문제인 외로움이나 대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한 사역입니다.

E. 텔레케어 사역(Telecare ministry)

전화를 통한 사역으로 성도를 돌보는 것입니다. SCC는 23000명이 모이는 교회이지만 1년에 2번 전화를 교회로부터 받도록 돌봄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 때 각 가정의 필요한 것들에 대해 성령의 인도를 구하며 간단하게 전화하지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문 사항이 있으면 대답을 해 줄 수 있도록 봉사자들을 사전에 훈련시킨다는 것입니다. 또한 더욱 필요한 것이 있을 경우 교회의 사역 팀을 안내해 주어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F. 병원 방문 사억 (Hospital-visitation ministry)

SCC의 경우는 매일 병원을 방문해야 할 정도로 많은 성도들이 병원에 입원을 한다는 것입니다. 봉사자들은 병원을 방문하며 환자와 함께 있고(stay), 말을 하고(talk), 기도를 하고(Pray), 돌보아 줍니다(care). 교회의 목회자들은 이런 사역을 여유 있고 세심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역 그룹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의 사역이 목회자보다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병원 방문은 깊은 자비와 사랑 그리고 시간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러셀목사는 휄로우십 사역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말하길 ‘거대한 나무는 거대한 뿌리 시스템(a massive root system)을 갖고 있다’고 비유했습니다. 그 뿌리들은 큰 바람이 불 때면 서로가 꽉 쥐고 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잘 짜여진 천처럼(interwoven) 서로 뿌리들이 꼭 잡고(literally holding) 나무가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교회가 이러한 관계의 기반구조(infrastructure of relationship)를 갖고 있다면 거대한 나무로 지탱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인생에 폭풍이 불어 올 때 서로가 힘을 다하여 막아주고 기운을 불어 넣을 수 있도록(reinforce) 꽉 잡고 있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교제가 튼튼한 교회입니다. 서로가 뿌리가 되어 큰 나무로 키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9. 청지기 - Stewardship

 

1) 빌딩에 너무 많이 써버리는 것인가?

   (Spending too much on building?)

SCC가 새로운 교회를 짓는데 9천만 달러가 소요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건물을 위해서 너무 많은 돈을 쓰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도록 기도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유대인 병원(Jewish Hospital; Louisville)은 약 천만 달러를 일 년에 쓰는데 아무도 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이 돈을 많이 쓴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그 빌딩은 병원의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그만한 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건물은 사람들이 보도록 하는 기념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위하여 사역하는 곳입니다. 그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많은 예산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큰 사역을 하려면 할수록 더 많은 경비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정을 잘해야 합니다. 밖으로 나가서 사용되는 경비를 투자하는 것이 그 교회의 목표에 부합되는 것인지 바른 판단을 해야 합니다. 전도를 위하고 사회 구원을 위하여 큰 예산을 사용하는 것도 좋지만 교회가 준비를 하지 않고 무조건 많은 경비를 쓴다는 것은 비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SCC는 많은 예산을 투자하여 세상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기 위한 목적을 중심으로 두고 방대한 시설을 한 건물을 지었습니다. 러셀 목사는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도달하는 방법을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에서 교회로 오게 하는 것으로 방향 설정 (direction setting)을 한 것입니다. 그는 마태복음 4:4을 인용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SCC의 최우선 목적은 육체적 필요를 위한 음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을 공급하기 위한 교회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만일 SCC가 배고픈 사람들을 먹인다 할지라도 죄로부터 그들을 구원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며 그들은 아직도 영원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SCC는 지역과 사회를 위하여 투자를 하지만 재정적인 지원보다 실질적으로 교인들의 동참으로 모아진 신발이나 옷을 주고 제 3세계의 선교를 위해 한 해에 수백만 달러씩 지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역 단체에 수천 달러를 매년 지원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2)                                                       

   (Why preachers hate to talk about money)

러셀은 방송 설교를 하면서 4주 동안 돈에 대한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한 목사로 부터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밥(Bob)에게 전해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가 돈 설교를 그만 두는 게 낫지,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교회에서 사람들은 떠나고 말 것이다”라는 내용 이었습니다. 러셀 목사의 사모는 그 목사에게 답장을 보내길 ‘당신은 예수님의 비유(Parables)의 반이 돈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이런 주제의 설교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의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의 물질에 대해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매일 돈에 대해 전쟁을 벌이는 것과 같은 물질만능 시대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청지기는 후하게 주는 삶의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직도 대부분의 목사들은 돈을 주제로 한 설교를 꺼내지(broach) 않고 있습니다. 설교자들은 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미국의 경우 주보(bulletin)에 안내되는 문구는 ‘만일 당신이 게스트(guest)라면 헌금을 할 때 참여해야 될 의무가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즐겁게 예배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라고 헌금에 대해 편한 마음을 갖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당신이 게스트로서, 당신이 기분이 나쁘다면 찬양을 하지 않아도 되고 초청에 응하지 않아도 됩니다.’ ‘만일 당신이 오늘의 설교가 성적 순결(sexual purity)에 대한 내용을 들을 텐데 듣기에 불편한 느낌을 갖는 다면 귀를 막고 있으십시오.’ 이렇게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고 편안한 설교만을 주제로 삼고 내용을 걸러서 전한다면 그들은 왜곡된 선택으로 인하여 신앙생활을 잘못할 뿐 아니라 교회생활을 바르게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돈에 대한 성도들의 신앙은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나 성도들에게 왜 돈에 대한 설교가 그렇게 민감한 주제인가?

                                                      

   (Reputation of television evangelists)

미국의 경우 TV 전도자들은 재정적으로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평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반적으로 사실입니다. 그들은 누가 말하든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메디아(media)는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곳입니다. 텔레전도자나 어떤 목사들은 항상 돈에만 집중되어 있는 반면에 많은 목사들은 전혀 돈에 대해 말하기를 원하지 않는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경우는 잘못된 부흥사들의 끼친 악영향이나 일부 기도원 등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현상들로 인하여 돈에 대한 설교를 하면 회중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시대적으로 인터넷이나 케이블 텔레비전을 통해서 간혹 검증되지 않고 건강하지 않는 교회의 목사들이 교회의 예배시 했던 설교들을 필터링하지 않고 그대로 내보내고 주관사들도 상업적인 성향을 갖다 보면 자연히 잘못될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들 중에는 돈에 대한 설교를 하면 부담으로 느끼고 마치 거룩하지 못한 것처럼 생각하여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결국 돈에 대한 설교를 성도들에게 민감한 반응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2)                                                       

   (Fear of offending people)

설교자들이 돈에 대한 설교를 하지 않는 원인 중의 하나가 그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서게 될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러셀 목사는 말하길 그들이 구도자라 할지라도 아니면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라 할지라도 그런 설교를 피하거나 가능하면 헌금하는 것을 다운 플레이(downplay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부활을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 돈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도 진리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진리를 가르칠 때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을 바꾸어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돈에 대한 설교를 할 때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을 수 있고 증오하는 편지도 받을 수 있으며 ‘                                   ’ (moneygrubber)이라고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계적 전도자 무디(Dwight Moody)도 그런 편지를 받고 오직 한 마디로 답장을 해주었는데 ‘바보’(fool)라는 단어 하나였습니다. 청지기는 돈에 대한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명확한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돈에 대해서 정확하지 않고 분별성이 없으면 다른 생활에도 질서가 없습니다. 만일 청지기직을 감당하는 사람이 돈에 대한 설교를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직 영적으로 미숙하든지 어린 청지기입니다. 귀중한 청지기직을 맡을수록 돈에 연관된 사역들이 많기에 돈에 대한 청지기의 역할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3) 청지기직을 설교해야 할 5가지 이유

   (Five reasons to preach on stewardship)

러셀 목사는 일 년에 한번 정도 돈에 대한 설교를 하다가 청지기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는 자주 돈에 대한 설교를 하기로 결심을 하고 교인들에게 정중하게 말하길 우리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은 의무와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드리는 삶’(giving life)에 대해 설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돈에 대한 설교를 자주해야 하는지에 5가지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이것은 목사들이 하나님 편에서 하는 목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중요하고도 받아 들여 할 원리입니다.

                                                      

   (God's word speaks often about stewardship)

바울은 말하길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7)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망설이지 않는 바울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청지기직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다른 어느 주제보다도 청지기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지옥이나 천국,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보다 돈에 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21에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시면서 돈의 중요성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청지기 사역의 권위자인 브라이언 스올드(Brian Sluth, CSA)는 ‘성경 안에 2350절이 돈을 다루는 것과 소유에 대한 말씀으로 어느 주제보다도 많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가장 적게 말하는 주제이다. 교회가 침묵하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풍부한 라이프스타일을 뒷받침 해주지 못하고 책임감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였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에서 돈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의 교회와 같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부자인 젊은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를 향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막 10:21). 이 말씀을 듣고 젊은이는 근심하고 슬퍼하며 떠났습니다. 돈에 대해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돈을 우상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13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똑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만일 교회가 돈에 대해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이 모르고 돈을 우상으로 섬기며 돈에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돈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구별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실패하는 원인이 돈의 시험입니다. 청지기는 돈에 대한 진리의 말씀을 성경을 통하여 훈련되어야 합니다.

                                                      

   (Generosity transforms people)

교회에서 돈에 대한 청지기 설교를 해야 하는 이유는 변화를 위해서 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후하게 드리는 삶을 살도록 변화되어야 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원숭이를 잡을 때 바나나를 주둥이가 작은 항아리에 넣고 그 항아리를 나무에 메달아 놓으면 원숭이는 항아리에 손을 넣어 바나나를 꺼내기 위해 힘을 쓰다가 잡힌다는 것입니다. 손에 쥐고 있는 바나나를 놓아야 도망을 갈 수 있는데 손을 놓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욕심입니다. 가장 쉽게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는 길은 바나나를 손에서 놓는 일입니다.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변화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 것들을 쥐고 있는 것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자유롭게 됩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어떤 헌금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드리는 삶을 통해 그들이 기쁘게 동참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과 동시에 이 세상의 것을 위해 창고를 늘려가는 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유익한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기 위해 드리는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이것은 많이 갖기 위해서 착취하는 세상 사람과 다른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삶을 살도록 교회는 사람들의 삶의 목적을 변화시키기 위해 돈의 설교를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35에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했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삶을 사는 것의 결과는 개인적으로 당신의 인생에 영적인 충만한 삶과 축복된 삶을 살도록 관계를 맺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육신적 필요까지도 돌보아 주신다는 약속 역시 주는 삶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청지기직을 감당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후하게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③                                                       

(Money is often necessary to advance the Gospel)

미국의 복음적 그리스도인의 경우 수입의 3.5퍼센트만을 기부를 하거나 자선 단체와 기관에 지출을 하고 산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도 선교나 밖의 사역을 위하여 많은 헌금을 주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사역을 위한 돈이지 투기를 목적으로 하거나 모든 재정을 건물이나 시설 확충에만 투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제2, 3세대를 워한 교육, 지역을 위한 사역이나 제 3세계를 위한 사역, 불우한 사람들을 위한 사역, 전도를 위한 사역 등을 위하여 많은 예산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풍부한 재정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청지기란 돈을 버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미있게 사용하도록 물질관이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재정관리를 잘 할 수 있도록 돈에 대한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Generous giving is a positive testimony)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엇이 유익하고 어떤 매력을 주는가를 찾게 됩니다. 그러다가 돈 설교를 듣게 되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입니다. 전자는 돈 설교를 들으면서 그 설교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생각하며 순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인 경우는 돈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면 불편한 심기를 느끼며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주는 것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신 분이며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후히 주는 삶입니다. 희생적으로 주는 삶을 사는 회중들이 있는 공동체는 능력 있는 간증을 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주는 교회입니다. 주는 자(giver)들이 많은 교회가 성장을 합니다.

                                                      

   (People need stewardship advice)

사람들이 주는 열정이 있을 때 짐이 가벼워지고 어깨가 올라갑니다. 돈에 대해 설교를 하는 것은 돈을 잘 다루도록 가르치는 일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돈에 대해 말하길 부자를 의지하지 말 것, 부자 되기 위해서만 허송하지 말 것, 빚의 노예가 되지 말 것, 정직하게 돈을 벌 것, 소비와 저축을 지혜롭게 할 것, 관대하게 베풀 것을 잠언서나 산상설교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목사는 계속해서 돈에 대해 설교를 하고 저들이 또 듣고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돈은 트랩(trap) 즉, 함정 혹은 덫이기 때문입니다. 왜 러셀 목사는 돈에 대한 청지기 설교를 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는지? 그는 말하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명하게 듣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축복을 말하면서 돈만을 쫓는 사람(hound people)을 만들어 내거나 돈만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 많은 헌금 시간을 갖기 위해서 세워진 곳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바른 돈의 신앙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참된 그리스도인들로 세워야 합니다. 러셀 목사는 일 년에 정기적으로 4-5주를 청지기에 대한 토픽 설교를 하고 단순히 돈을 주는 것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직하게 벌고, 쓰는 것과 저축하는 지혜들에 대해 훈련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SCC는 청지기 설교를 통해 주고 베풀고 드리는 것에 높은 향상을 가져왔고 하나님이 그 교회를 풍부하게 지원해 주셨다고 간증했습니다.

4) 몇 가지 실천적인 제안들

  (Some practical advice)

                                                      

   (Focus on regular stewardship, not crisis giving)

거의 모든 교회들은 교회의 위기가 왔을 때 돈 때문이라고 변명을 합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런 위기에 전혀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인색한 모습을 보이며 위기를 극복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9:7에서 말하길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즐겨내는 것은 위기 때나 어느 때나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주는 것을 훈련한다는 것은 돈을 내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관대해 지도록 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의무를 다하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SCC는 청지기직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하는 집중 훈련을 3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We preach regularly about giving)

주로 일윌 달에 시리즈 토픽설교로 버는 것, 쓰는 것, 투자하는 것, 주는 것에 대한 크리스천 생활을 결심하도록 합니다.

둘째.                                                         

   (We send out offering envelopes once a month)

교회의 멤버로서 의무를 다하도록 매월 기억시키기 위해 봉투를 각 가정에 보내 줍니다.

셋째.                                                         

   (We conduct stewardship seminars and provide financial counseling)

재정적으로 곤경에 천한 사람을 돕는 것과 창조적 삶을 살도록 특별한 자리를 만들어 구체적으로 도움을 줍니다. 

                                                      

   (Handle the money wisely)

교인들이 적은 헌금을 내면 교회는 관리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황폐해지고 맙니다. 그리고 아무도 교회의 어려움에 동참을 하지 않고 재정적인 지원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사역을 원활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첫째,                                                        

  (Have Proper accountability measure in Place)

헌금을 정확하게 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것도 교회의 의무이고 책임감 없이 하나님의 것을 사용하지 않도록 횡령자금(embezzle money)을 피하도록 교훈의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돈을 셈하도록 가르치고 작은 돈이라도 바르게 사용하도록 하머 특히 사역자들이 돈에 대해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를 시켜야 합니다.

둘째,                                                        

(Prayerfully spend money on the priorities)

교회가 돈을 무조건 많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모든 교회는 무엇을 위하여 교회가 돈이 필요한지 그 중요성을 알고 결정해야 합니다. 주차장 시설을 넓히고, 강단을 새롭게 페인트를 칠하고, 지역의 불쌍한 아이들을 돕고, 사역자들을 고용하고, 어떤 프로그램을 하게 될 때 회중들에게 헌금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힘 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도록 리더가 결심을 하는 최종적인 목적들이 있어야 합니다. 재정 결정(financial decision)을 할 때는 언제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마음속에 정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효과적인 복음 사역을 위한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무엇이 최고인지에 따라서 재정 결정이 내려져야 바른 것입니다. 그 때는 비판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수용하겠다는 자세를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회중은 그 결정을 존경하게 되고 더 많은 드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셋째.                                                           

(Give o greater percentage of the church offerings to trustworthy missions)

기독교는 세계를 위하여 일하는 명령을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선교불모지에 복음을 심고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헌금하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향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국 내에 교회를 개척하고 지원하는 사역들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 교회의 헌금이 바른 곳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뢰받을 만한 곳에 지원을 해야 헌금의 가치가 살아있게 됩니다. 교회는 국외내의 선교를 위하여 지원하는 헌금을 늘려야 하고 높여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고 진리로 세워진 교회임을 회중들이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Conduct only purposeful, Well-planned capital)

캠페인(Campaigns) 

SCC는 엄청난 재정적 축복을 받았다고 러셀은 말했습니다. 미국에서 1983년 교회예산이 가장 먼저 백만 달러에 도달한 교회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했고, 재정캠페인(capital Campaign)을 연 1993년 이천 육백만 달러의 재정 목표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 26백만 달러를 모금하는 캠페인의 이름을 ‘Beyond the open door’(열린 문 너머로) - 그것은 그 시대에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거대한 재정이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희생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를 필요한 재정 이상으로 축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재정캠페인 경험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배움을 갖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 재정 캠페인이 성공할 수 있었던 7가지 이유들은 무엇인가?

1. 각 캠페인은         (tangible)           (exciting purpose)을 주게 되었다.

2.                         (God's guidance)에 대해 기도하게 되었다(Prayed).

3. 컨설턴트(consultant)를                                           (hired).

4. 리더들이                                   (set the pace).

5. 기간 동안                          (testimonies of sacrifice) 나누게 되었다.

6. 회중들에게 기도하도록                 (asked)할 수 있게 되었다.

7.                  (victories)를 기념하게 되었다.(celebrated).

10. 전도 - Evangelism

 

1)                                               

   (The main thing)

무엇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중심 사명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to seek and to save what was lost 눅 19:10)입니다. 사람을 찾아 구원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인 것처럼 교회에 주신 사명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주신 사명을 마태복음 28:19-20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들이 쉽게 주님의 제1사명을 묵살(side track)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러셀 목사는 몇 년 동안 기도했던 내용이 기독교를 반대하는 마약(antidrug), 알코올(antialcohol), 포르노그라픽(antipornography), 동성애(antihomosexuality), 낙태(antiabortion), 도박(antigambling)에 대한 저지 운동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교회 공동체의 관념처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길 우리들이 세상의 죄를 멈추게 하는 것이 제 1의 부르심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제 1 부르심의 목적은 예수 안에서 사람들이 구원 받도록 예수님께 데리고 가는 것이며 복음을 전하도록 한 것입니다. 교회가 커지면 사람들은 정치적인 활동을 원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물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과 사람들을 교회의 공동체에 참여시키기 위해 격려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교회의 최고의 일은 공동체가 부흥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부흥은 영혼 구원입니다. 사탄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여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을 막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사탄의 전략을 공격하여 승리를 얻는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람을 구원시키는 것은 다른 방법으로 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4:1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오직 예수님만이 이 세상을 구원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정치적 활동이나 사회 활동, 복지 사업, 문화행사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35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굶주린 사람의 입에 빵을 넣어주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생명의 떡(the bread of life)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교회가 기억해야 할 제 1의 사명(the primary mission)입니다. 그 제 1 사명의 가장 중요한 핵심(The main thing)은 전도입니다.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할 때 다른 어떤 것을 주는 것보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베드로는 감옥에서 복음을 전할 때 천사가 와서 그를 자유케 해주고 베드로 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지금 가라 그리고 사람들에게 전하라 이런 정치구조는 파멸되고 말 것이다.’ 아니면 ‘산헤드린을 대항하기 위하여 거리로 나가라’ ‘가난한 사람을 먹여라’했습니까? 천사가 말한 것은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행 5:20)는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가서 전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순종을 했고 42절에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 하니라”고 했습니다.

SCC가 급성장한 거대한 교회가 된 것은 제 1의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복음 전도자로 양육을 받으며 항상 ‘최고의 전도자’(the best evangelist)가 되기 위해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길 목자에게 100마리의 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그 중의 한 마리 양을 잃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좋아, 나는 많은 양들이 있으니 괜찮아. 한 마리 정도는 걱정 할 것도 없지’라고 했습니까? 누가복음 15:4-7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사람들은 러셀 목사에게 질문하기를 교회 성도가 그렇게 많은데 왜 더 성장해야 한다고 계속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얼마나 더 큰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그는 말하길 ‘얼마나 큰 교회로 우리 교회가 존재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갈 때까지 전도는 계속될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99명의 믿는 사람들보다 1명의 새로 태어나는 사람(one new birth)을 보면서 더욱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아버지로 새롭게 태어난 자녀를 사랑하십니다. 교회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제 1 사명을 계속해야 합니다.

2) 자격자들

  (Some qualifiers)

전도는 당신의 교회에 우선순위이지만 전도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있어야 전도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이든지 준비된 전도의 자질과 열정이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전도자들이 알아야 할 내용들이 있습니다. 

① 전도는                                               

  (Evangelism should not take precedence over truth)

노아는 전도자로서 오직 여덟 사람을 구원시켰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방주 안에 들어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혹하는 자세로 유람선을 타라고 했거나 노아동물원에 자유이용권을 받으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노아 방주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필요조건(Prerequisite)이 있는데 죄에서 돌아서고 말씀을 믿어야 했습니다. 전도는 사람들을 현혹시켜서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가서 전도하는 일은 교인의 숫자를 늘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게 하고 궁극적으로 일꾼과 제자를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교회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훈련시켜야 합니다. 

② 전도는                                               

   (Evangelism is not the church's only purpose)

전도는 교회의 최우선 목적입니다. 그렇지만 오직 그것 하나만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명령하신 것은 충성스럽게 주의 길을 가는 제자를 만들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commandment). 교회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사역자가 되고 계발된 일꾼을 만드는 것도 존재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사람의 숫자를 교회가 계산하는 것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전도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도를 한 후 그들을 훈련시키는 각종 사역들이 중요하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③ 전도는                                               

   (Evangelism is not measured by comparative statistics)

예수께서 말씀하길 어떤 씨앗이 딱딱한 밭에 떨어지면 전혀 자라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씨앗은 옥토에 떨어지면 다른 결과를 생산해 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마 13:3-9). 전도를 할 때 어떤 필드는 다른 곳보다 더 잘 받아들이고 어떤 곳은 잠재적으로 다른 곳에 비해 인구의 수나 문화의 차이 그리고 상태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나 전도가 잘되고 같은 비율로 전도의 수가 증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같은 노력을 해도 적게 전도되는 곳이 있고 많은 열매를 거두는 곳이 있습니다. 빨리 전도 되는 곳과 늦게 전도 되는 곳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도시 지역은 전도하는데 결코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상하는 대로 또는 지역의 통계 숫자는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교인들 중에 전도에 대한 열정을 결코 잃지 않고 모든 사람을 전도 대상자로 보고 찾아다니고 또 찾아다니면 전도는 된다는 것입니다. 러셀 목사의 어머니는 83세 때(2000년)에도 전도를 쉬지 않고 전도를 함으로 교회를 성장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데 기운을 북돋우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목사는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전도의 최고의 방법은 잃은 사람을 계속 찾는 것이고 중요한 것 중요한 것(the main thing the main thing)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성도들의 끊임없는 전도 열정과 실천은 교회를 새로운 사람들로 가득 차게 할 수 있습니다. 

3) 실제적 제안

  (Practical suggestions)

모든 문화는 다릅니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 어느 마을, 어느 지역이든지 모든 문화적 상황은 차이가 있고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전도를 포기하거나 어렵게만 생각하며 망설이고만 있다면 교회는 성장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지 못할 것입니다. 전도를 위한 문화적 배경을 이겨 내며 전도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사용하여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전도를 하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실제적인 방법들은 무엇인가?

                                              

   (Preach to the christians in your congregation)

전도에 대한 메시지만 설교하지 말라. 어떤 목사들은 실수하며 믿고 있는 것이 그들의 교회가 전도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전도 설교만을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설교는 두 가지의 초점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영적 성숙을 위한 설교와 처음 교회 나온 사람들을 위한 설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래 믿은 사람이든 처음 믿은 사람이든 반드시 들어야 할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정기적으로 구원의 기초에 대한 설교를 정확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설교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을 위하여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은 전도 설교들 보다 더 전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교회의 회중들이 영적으로 충만해 지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on fire)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친구를 도와주는 것(help)이 아니라 친구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tell).

최고의 전도는 자신이 발견한 그 무엇에 관하여 흥분하며 말하는 것입니다. 엠마오의 길을 걷다 주님을 발견한 두 사람처럼 열정을 가지고 친구를 찾아가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난 그 사람에 관하여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런 종류의 전도는 확실하고(authentic) 전염성이 강한(contagious) 것입니다. 만일 목사가 이런 진리를 설교한다면 그들의 삶에 영향력을 주고 그들이 입을 다물고 조용하게 있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들이 진실로 구원을 체험한 사람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면 그 만난 사실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전도가 어렵고 억지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Adopt the “come-and-see” method of Evangelism)

대부분 전도에 대한 전통적인 방법은 축호 전도(door-to-door calling)입니다. 미국의 경우나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을 방문하여 문을 두드리고 전도하는 문화는 점점 힘들고 사람들이 수용하지 않는 환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이상한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 열어주지 않습니다. 무작정 찾아오는 것은 실례가 되고 약속되지 않은 방문이나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더 이상 환영을 받지 못하는 전도법입니다. 전도에 성공적인 모델을 찾는 것이 시급하고 새로운 전도 문화로 바꾸는 것은 앞으로 교회들이 개발해야 될 필연적 사역입니다. 

러셀 목사는 최고의 전도법을 소개하는데 ‘         ’(word-of-mouth method; WOM)전도입니다. 이것이 컴앤씨(come - and - see)라는 ‘            ’입니다. 신약성경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로 소개되는 안드레는 베드로에게 찾아가 ‘우리가 메시야를 발견했습니다. 와보라’고 했습니다. 언젠가 나다나엘은 말하길 나사렛에서 이런 좋은 일이 일어나겠는가라고 질문을 할 때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보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모든 사람들에게 ‘와보라’고 말했습니다.

러셀 목사는 레스토랑을 비유하면서 유명한 레스토랑은 광고를 내서 사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좋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다시 오고 그들은 그의 친구들까지 데리고 또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레스토랑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온다고 했습니다. 만일 교회가 신선한 영적인 빵을 제공하면 사람들은 그들의 친구를 데리고 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구전법의 원리(WOM principle)입니다. 

이렇게 ‘와보라’ 전도 방법은 교회로 인도하는 전도 방법 같지만 궁극적으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방법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친구들을 향하여 ‘와보라’고 한다면 그들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것은 주께서 하시는 다음 단계의 일입니다. 교회의 모든 스텝과 사역자 그리고 성도들은 ‘와보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 다음의 단계는 주께 맡기면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6-7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와보라의 전도 방법을 교회에서 채택하는 것은 당연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 특별한 것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체의 교회는 몸입니다. 전도를 시도하는 것은 몸을 이루는 일입니다. 전도자란 목사나 스텝을 가리키거나 설교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감이 넘치는 곳으로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은 모든 공동체가 해야 될 전도자로서의 일입니다.

‘와보라’의 전도 방법은 최고의 전도법입니다. 이 전도 방법이 교회에 주는 유익 중의 하나는 훈련(training)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교회로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전도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새롭게 믿음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new Christian)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위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non - Christian)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직 성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구원의 단계에 대해 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신학적인 논쟁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친구들은 초청할 수 있습니다.

슈바르츠(Christian Schwarz, Natural Church Development)는 자연적 교회 성장이란 책에서 건강한 교회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성장하는 교회와 쇠퇴하는 교회 둘 다 불신자들을 만나는 수는 똑같지만 새로운 친구를 크리스천이 되게 하기 위하여 만남을 갖는 것은 다르다’라고 했습니다. SCC는 교회를 소개하기 위하여 특별한 광고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SCC의 교인들의 90퍼센트가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는 일(invite)에 참여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전도 방법은 오직 '와보라'였습니다. 

                                                

   (Make the church experience inspiring)

성도들이 영감으로 충만해지면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일은 쉽습니다. 탁월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모든 노력이 필요합니다. 전도는 먼저 자신이 영적으로 충만해져 있어야 하고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전도는 친구에게 인사정도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이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충만하고 생기가 있고 고무되고 산소를 마시는 것과 같고 힘을 불어 넣는 곳이 되면 전도는 훨씬 쉬워집니다. 왜냐하면 그런 곳에 사람들은 또다시 오기 때문입니다. SCC는 탁월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항상 노력하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사역하는 스텝들은 물론 교회의 분위기도 영적으로 충만함을 유지하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역자나 자원봉사자들을 훈련시킬 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사우스이스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Southeast)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교회 안내 데스크 뒤에는 ‘Welcome to Southeast. May I help you?’(사우스이스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붙였고 주보에도 ‘Welcome to Southeast’라고 썼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SCC에 방문할 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경험을 함으로 다시 오기를 기대 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스텝 중의 한 사역자는 이렇게 SCC를 소개 했습니다. ‘                        ’(a friendly place)으로 처음 교회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에게 가장 친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교회가 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처음 왔을 그 시간에 사랑을 느끼도록 하고, 그리고 교회를 떠날 때까지 사랑이 머물도록 하는 교회를 위하여 그들이 놀라게 만족하도록 만들고, 그들을 위해 탁월하게 일하고, 그들의 마음에 힘을 불어 넣어주어 그들의 인생에 관련된 교회가 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Remind the members of the mission)

리더이든 회중이든 교회의 제 1의 사명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SCC의 사명 선언문(mission statement)은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잃어버린 사람에게 전도하고 구원받도록 교화시키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한 사역자가 되고 공동체 안에서 본이 된다’입니다. SCC의 성도 90퍼센트가 우리 교회의 사명선언문을 이해하고 동의하고 따른다고 러셀목사는 말했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모든 멤버들은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제 1의 사명임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외의 것들은 두 번째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러셀 목사는 이 사명선언문을 성도들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했고 자주 반복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의 사명선언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시리즈 설교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리더나 핵심 멤버들은 미션을 이루기 위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스텝을 고용할 때 묻는 것은 우리 교회의 제 1의 사명에 동의합니까? 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계속해서 성장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런 철학을 불어 넣어줄 수 있습니까? 만일 이런 철학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고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사명과 의식에 큰 손해를 끼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이벤트들은 전도성을 띠고 있어야 합니다. 깊이 있게 하고 충만하게 하고 좋은 관계를 만들고 재미있게 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향하고 교회에 처음 찾아온 사람들을 환영하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전도하기 위한 의식이 중요한 것입니다. 러셀 목사는 전도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말하길 ‘우리 교회의 제 1의 사명은 건물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나 사람들이 감동을 받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 목사는 확인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고 이해하며 동의하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전도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과 우리 교회의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합니다. 어느 한 노인이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최근에 당신의 교회에서 구원받은 어떤 사람이 있는가? 진지하게 목사나 회중들은 대답을 해야 합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Remind them to invite their friends)

예수를 믿지 않는 친구를 전도하는 것에는 두 가지 행동이 있습니다. 다음 주일에 우리 교회에 갔으면 하는데, 만일 네가 좋아하지 않는다면 내가 저녁이나 사줄게, 좋겠니? 이렇게 전도하는 것은  ‘                   ’(a bold invitation)입니다. 그러나 친구, 이번 주일에 우리 교회에 처음 방문하는 것이겠지만 함께 가면 좋을 것 같아, 너에게 좋은 일이 있을 거야, 그리고 너에게 좋은 저녁을 대접할게. 이것은 진정으로 친구를 사랑해서 하는 ‘                     ’(a special invitation)입니다. 친구를 전도하는 것은 특별한 초청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예배나 행사를 준비할 때 성도들은 그들의 친구를 초청하는 습관을 갖게 하고 전도하도록 하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 목사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랄 때,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었을 때에 교회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교회로 인도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것을 자주 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에 게으르고 우물쭈물하면서 뒤로 미룹니다. 그럴 때 목사는 아주 특별한 시리즈 설교를 통해서 회중들의 영적인 각성과 함께 적극적 기회를 제공하여 ‘와보라’는 전도를 하도록 상기시켜야 합니다. 

불신자나 교회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사람들은(unchurched people) 정기적인 예배보다 특별한 행사나 절기 예배(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 때에 오는 것이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예배가 준비되면 목사는 사람들을 초청하도록 상기시켜 주어야 합니다. SCC의 러셀 목사는 ‘초청 카드’를 만들 때 한 쪽에는 아주 예쁜 그림에 ‘초청합니다’라는 문구를 넣고 뒷면에는 세밀하게 토픽설교의 내용들의 핵심을 넣고 초청 시간과 방향을 기록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편을 통해서 카드를 발송하기도 하고 직접 자신의 친구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특별한 예배에 특별한 초청을 특별하게 하도록 상기시켜주는 것이 특별한 전도 목회입니다.

                                              

   (Be considerate of the guests)

우리 교회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민감하라. 그리고 그들이 프로그램을 위하지 않도록 하라. 일반적인 교회의 예배는 예배의 목적을 위하여 예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중요함은 보다 더 많은 사람이 찾아와 예배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 둘 다에게 유익을 주는 예배가 최상의 예배입니다. 가장 힘 있는 전도를 위한 한 가지 방법은 진정한 예배(authentic worship)입니다. SCC는 예배의 프로그램을 결정할 때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어떻게 예배자들을 도울까에 있지 방문자들에게 우리 교회의 예배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핵심을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이 ‘믿지 않는 사람’(unbeliever)입니다. 특별히 22-33까지 그리고 그 가운데 22-23의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워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하는 의미는 예배를 드리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의 예배에 참석을 했는데 모두가 이상한 말을 하고만 있다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교회에 오는 게스트들(방문객)에게 환영하는 예배와 편안함을 주는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러셀 목사는 교회가 적을 때에는 기록 카드(roll-card)에 자신이 처음 방문한 것을 적어 헌금 시간에 내도록 했는데 교회가 커지면서 바꾸길 예배가 끝나기 바로 전 특별한 안내 시간을 통하여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우리 교회에 처음 오셨다면 참으로 기쁘게 환영을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안내자가 교회를 안내 해주고 교회 신문을 드릴 것입니다. 만일 원하시면 당신의 손을 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이 다시 방문하기를 원합니다.’ 일반적으로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손을 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보고 실질적으로 어떤 교회인지를 알고 난 후, 두 번째 세 번째 방문했을 때 손을 든다고 했습니다. 손을 들고 난 후에는 교회에서 준비한 신문, 팜플렛(Pamphlet), 카세트 테이프(한쪽 면은 찬앙을 뒷면에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의 설교) 준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하고 세밀하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배려한다면 그들은 정착을 쉽게 할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또 다른 배려는 새신자들이 언제든지 예배 후 목사를 만날 수 있다는 안내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지정된 장소에서 몇 시에 목사를 만날 수 있음을 안내하는 것도 배려입니다. 새롭게 교회에 와서 그들이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해야 다시 오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Offer a 'What we believe' class)

SCC는 새롭게 교회에 온 사람들을 위하여 6시간짜리 기초 클래스를 운영합니다. 복음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클래스입니다. 이 클래스는 신청을 하지 않고 아무나 들을 수 있도록 열려있는 과정입니다. 새신자뿐만 아니라 기존 신자들도 얼마든지 기초에 대해 듣고 싶으면 참석 가능한데 3-4번 듣는 사람들도 많다고 했습니다. 이 과정을 하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고 그 다음 세례를 받게 하는데 있습니다. 교회에 방문자라고 이런 과정을 권하지 않으면 그들은 교회를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여 오랫동안 교인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에 교회는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알게 하는 과정을 만들어 그들에게 제공해야 합니다. 1년에 4-5차례 기초과정 클래스를 여는 것도 효과적 일 수 있습니다. 

                                              

   (Have private decision counseling)

SCC는 설교가 끝이 나면 바로 초청을 시간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두 가지 초청을 하는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와 살도록 하는 것과 세례를 받고 교회의 멤버(membership)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이 나면 그들은 준비된 방에서 개인적으로 예수님과의 관계와 구원 받은 것을 설명하도록 리더가 준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지식이 약하거나 그리스도에 대해 듣지 못하였거나 기회가 없어서 복음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SCC는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복음을 설명해 주는 카운슬러를 두어 구원 상담을 개인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역을 통하여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의 멤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교회에 오랜 기간 다닌 사람들 중에도 이곳을 찾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훈련된 복음을 설명해 주는 영적 상담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사역을 통하여 성도들이 훨씬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교회가 제공하고 특히 새로운 사람 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도록 하는 것은 정말 시급한 일입니다. 그들이 오늘 어떻게 될지 모르고 그들의 미래가 아직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은 긴급한 사역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브리지(bridge)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을 교회로만 오게 하지 말고 그들이 구원받도록 하는 일에 전력하는 목사가 되어야 하나님이 교회를 축복하십니다. 전도하는 교회가 되려면 먼저 구원 상담자를 준비해야 합니다. 

                                              

   (Have a decision day)

SCC는 성공적인 결정의 날과 결정의 주말을 계획하고 6주전부터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매 년 1월 첫 주말을 결정의 주말로 정하고 회중들에게 알려줍니다. 그때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전도해야 한다는 의사결정을 미리 생각하도록 하며 다른 이유로 인하여 우물쭈물하지 않도록 알려 줍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1월은 적극적으로 인생의 변화를 결심하게 하는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이 행사를 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첫째, 지난 해 12월 초에 교회로 인도할 친구들의 이름을 정하게 하는 편지를 가정으로 보냅니다.

둘째, 1월 첫 주인 결정의 주말(a decision weekend)이 있다는 것을 편지에 알려 줍니다. 

셋째, 결정의 주말에 초청할 사람을 신중하게 정하도록 합니다. 

넷째, 교회로 데려올 목표의 날자(a target date)를 결정의 주말에 정하여 초청 하도록 합니다. 

다섯째, 결정의 날(a decision day)에 데려옵니다. 

6주 동안 계속해서 교회가 새로운 초청한 사람들이 교회를 방문하도록 하고 교회는 모든 준비를 앞에서와 같이 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전도는 회중들의 전체적 참여가 관건입니다. 그러기 위해 결정의 주말과 결정의 날을 신중하게 정하도록 격려를 하여 전도를 함으로 성공적으로 한해를 출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Be prepared for the spirit of God to move)

전도에 대한 기대가 없으면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마 언젠가는 되겠지 하고 막연하게 있다면 전도를 통해 교회는 성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먼저 성도들이 어느 곳에서 전도를 하게 되고 누구를 전도하며 어떻게 전도 할 수 있는지 성령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이미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강팍해져 있습니다. 전도를 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할 수 없는 일도 아닙니다. 교회가 전도를 강조하고 목사가 전도시리즈 설교를 해도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초청카드를 보내고 결정의 날에 친구를 데려오라고 격려를 해도 그들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행동으로도 옮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이 하시면 가능합니다. 교회의 제 1의 사명이 전도라고 외쳤습니다. 잃은 영혼을 찾아 ‘와보라’고 초청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성령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들의 결심이 오랜 기간 지속되도록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하는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한 번의 행사로 끝이 나는 전도가 되지 않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깊이 그리고 오랫동안 일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4)                                               

   (This ship is going down)

진리를 말한다면 사람들의 죄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누가 이 땅에 오셔서 이 세상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까? 다시 진리를 말하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없고 영원한 삶 즉, 영생을 얻을 수 있는 희망은 없습니다. 교회의 가장 높은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람들을 데려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길 세상은 사망의 길로 가는데 빠르다고 했고, 불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고, 멸망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오직 하나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시킬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가능하면 더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오게 해야 합니다. 러셀 목사에게 사람들 이 질문했습니다. 왜 이렇게 거대하게 건물을 지었고 9000석이 되는 예배실을 마련했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sinking ship)에 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내리게 하여                  (God's yacht)에 가능한 한 많이 태울 것입니다.’

우리는 침몰하는 배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울의 고백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남기고 싶은 말

교회는 바르게 성장하는 꿈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나 회중은 바르게 성장하는 진리의 교회를 위하여 충성스럽게 일하는 일꾼이어야 합니다. 침몰하는 배에 탄 사람들을 향하여 와보라고 외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러셀 목사의 의식과 믿음 그리고 SCC의 세워지는 모습이 오늘의 한국교회이어야 합니다. 교회를 크게 세우겠다는 비전은 잘못된 비전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더 크게 하기 위하여 크게 세우는 교회를 꿈꾸는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 (future), 교회의 미래를 위하여 이제부터라도 넓은 곳을 향하여 배를 띄우고 힘차게 노를 저어 가야 합니다. 저, 우리가 가야 할 그곳을 향하여 지금까지 나를 매어 놓은 닻줄을 풀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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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작은자| 원글보기
출처 : 진실하자 ! 진실은 통한다.
글쓴이 : 베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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