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관념적 기독교 맹점 예리하게 포착한 영화
기존 기독교 죄론과 구원론 허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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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밀양>. (사진제공 파인하우스필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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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야 할 의미는 하늘이 아니라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에 있다는 걸 <밀양>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 (이창동 감독의 칸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사람 죽여 놓고 미안하다면 다인가”, “도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인가?” (영화 <밀양> 극중의 대사)
신애, 삶의 제반적 고통 해결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여인
우리의 죄는 어떻게 용서 받을 수 있는가? 우리의 삶은 어떻게 고통에서 치유 받을 수 있는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이 코드를 기독교라는 종교를 통해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영화다.
주인공 신애(전도연)는 계속적으로 배반의 세월을 살아온 아픔의 여인으로 나온다. 배반의 세월을 살아왔기에 가슴에는 억눌린 한을 품고 살아가는 여자였다. 죽은 남편의 배신이 있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남편을 이해하고자 했고, 결국 죽은 남편의 고향이자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밀양으로 어린 아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내려온다.
신애는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이 낯선 땅에서 어린 아들과 사는 자신의 나약함을 오히려 방어하고자 돈 있는 허세를 부리다가 그만 자신의 어린 아들이 유괴당하는 뜻밖의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결국 어린 아들은 죽고 신애는 자신에게 있는 슬픔과 응어리진 한을 해결하지 못한 채 기독교라는 종교에 귀의한다. 그리고 일시적으로는 그 아픔들을 해결한다.
하지만 여기서 더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신애는 믿었던 그 신으로부터도 배반을 당한 것이다. 교회 생활로 인해 한동안 마음의 평안을 찾은 것처럼 나왔지만, 이미 신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나오는 그 살인범 죄수 앞에서 정작 피해당사자인 신애 자신은 그 관계에서 애초부터 빠져 있음을 알고 치를 떠는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정한 죄 사함과 고통의 치유
여기서 기존 기독교의 죄와 ‘죄 사함’이라는 용서의 코드를 살펴보면, 그것은 철저히 신과 개인이라는 ‘1대1 관계’에서 빚어지는 것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내 죄를 신께 자백하면 신은 내가 어떤 죄를 지었든 간에 한없는 용서를 해준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더 깊이 한번 생각해보라. 누군가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그 죄로 인해 고통을 받는 타자도 같이 발생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 수 있어야 한다. 즉, 죄(Sin)가 있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한(恨)도 같이 있다. 인간은 관계망에 놓여 있다. 이러한 관계적 사태에서 죄와 한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죄 사함은 신과 개인의 1대1 관계가 아니라 신과 죄인과 그 죄로 인해 고통 받은 이웃이라는 ‘3자적 관계’에서 고찰되어야 진정으로 그 죄와 죄 사함이라는 용서와 치유가 이뤄진다.
물론 신과 개인의 1대1 관계에서 죄 사함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만일 그것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관념적일 뿐이고, 실상은 아편적인 것이 될 뿐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죄 짓고도 그저 기도로 고백만 하면 스스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죄 사함을 받았다고 심리적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궁극적인 문제 해결이 못되는 아편일 수 있음을 신애가 기독교로 귀의하게 되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신애는 자신에게 있는 고통스런 아픔들이 평안하게 잘 해결되었다고 교인들 앞에서 은혜로운 간증 체험 마냥 고백한다. 물론 많은 교인들도 “아멘,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화답한다.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된 치유가 아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신애 자신이 평안함을 찾았다는 교인이면서도 무심코 살인자의 딸이 거리에서 맞고 있는 장면을 보고도 이를 외면하고 지나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기존 기독교가 주는 ‘평안’이라는 게 얼마나 얄팍한 허위임을 예리하게 간파할 수 있다.
궁극적인 죄사함 즉 진정한 구원과 용서와 치유는 신과 나(I)라는 1대1 관계에서가 아닌 ‘신과 나 그리고 이웃이라는 3자적 관계’에서 현실화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것을 ‘GIO’(God-I-Other)라고 부른다. 이 우주에선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언제나 ‘GIO에서의 나’인 것이다.
구원의 신비는 이 땅에서부터
결국 자신의 아픔을 해결했다고 생각했던 신애는 오히려 자신이 신의 관계로부터 배제되어 있고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고선 격분한다. 이제는 그 같은 허위들을 신에 대한, 기독교에 대한 증오와 반감으로서 표현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은 결국 신애 자신마저도 병들게 하고 갉아먹는 행위였을 뿐이다.
사실 신애가 진정으로 치유받기 위해선 결국 살인자의 딸과도 화해해야 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이를 거부한다. 치유되지 못한 한(恨)은 결국 정신 병리마저 낳는다. 가슴에 꺼이꺼이 박혀 있는 멍울진 슬픔과 한을 어디로부터 치유 받을 길이 없었다. 신애는 신과의 관계에서도 고통 받고 있던 자신이 이미 배제되어 있음을 알고서 타인과는 끝내 화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치유자의 역할로서, 영화 제목 <밀양>이 품고 있는 뜻인 ‘비밀의 햇볕’(Secret Sunshine)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배역이 바로 늘 그림자처럼 신애 옆에 함께 있어준 종찬(송강호)다. 종찬의 치유행위란 ‘언제나 곁에 있어줌’ 바로 그것이다. 신애가 아픈 병실에 있을 때 모든 타인들을 거부했지만 그래도 종찬 만큼은 끝내 거부하진 않았다. 종찬을 통해 아픔이 치유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희망을 보게 된다.
여전히 신애는 살인자의 딸과도 화해하지 못한, 치유되지 못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비극적 결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그녀가 이제 다시 거울을 본다는 것은 여전히 지속되는 비극 속에 새로운 희망의 암시를 준다. 여기서 종찬은 그녀에게 거울을 들어주고 있다. 구원자의 역할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신애는 종찬에게 밀양이고 종찬은 신애에게 밀양이다. 마찬가지로 신은 인간에게 밀양이고, 인간 역시 신에게 밀양이다. 신은 그토록 인간을 사랑하기에 이 땅에 죽기까지 내려오신 분이 아니셨던가.
영화의 첫 장면은 하늘로 시작해서 마지막 장면에는 질퍽한 개숫물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관념에서 현실로, 위에서 아래로, 신에서 인간으로 내려온 것이다. 질퍽한 개숫물은 분명한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라스트신에서 신애가 들여다보고 있는 바로 그 거울 속의 내용이다. 현재의 자신이 겪고 있는 질퍽한 고통을 올바로 직시한다는 것. 그것은 진정한 치유와 구원의 출발이다.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우리 안의 모든 고통과 아픔의 현장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죄로 인해 발생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온전한 치유는 신과 나의 1대1 관계만이 아닌 신과 나와 고통 받는 이웃이라는 3자적 관계에서 언제나 고찰되어야 한다.
분명히 알자.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온전한 죄 사함과 구원의 치유란, 결코 관념적이거나 비역사적이거나 아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현실적인 것이며, 온전한 치유를 지향하며, 이웃과 함께 사는 삶을 가리키고 있다.
건강한 치유의 삶 위한 영화 <밀양>이라는 텍스트
영화 <밀양>은 하나님만 사랑하고 고통 받는 이웃(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종교 신앙의 맹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만 사랑하고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 신앙이 아편적 신앙이다. 사실상 그것은 하나님마저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아편을 맞고도 치유를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며, 그런 식의 아편적 치유는 기독교 외의 다른 데서도 엿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일컬어 "기독교에 대한 영화냐?"고 묻는다면, 나는 꼭 "그렇진 않다!"고 얘기하고 싶다. 왜냐하면 죄와 고통의 문제는 보편적이기 때문이며, 온전한 치유와 구원의 문제 역시 사람 사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곳에는 언제나 고통이 있고 구원의 문제가 있다. 영화 <밀양>은 그 지점에 단지 기독교를 백그라운드로 해서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이 한 가지 흥미로운 생각을 해본 것은, 만일 신애가 교회를 찾아가지 않고 불교에 귀의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도 해봤었다. 불교 역시 고통의 해결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불교 또한 그 안에 관념적인 요인들도 없잖아 있다고 보지만, 암튼 매우 흥미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신애를 연기한 전도연의 연기는 정말 최고의 연기라는 표현도 무색하리만큼 거의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본 누구라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리라. 또한 야외 예배에서 목사님의 기도 중에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는 노래 시디를 트는 장면도 기존 기독교의 허위를 직설적으로 고발한 카타르시스를 크게 느낄 명장면이었다. 내 생각엔 아마도 안티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서도 꼽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내가 본 최고의 한국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불후의 걸작 <박하사탕>인데, <박하사탕>만큼의 흡인력은 아니지만(왜냐하면 기존 기독교의 코드를 잘 모르거나 별 관심 없는 사람이라면 지루했을 법 하기에) 그래도 올해의 수작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음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기존의 주류 보수 기독교가 아닌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 혹은 그러한 종교나 삶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영화 <밀양>이라는 수작이 더없이 반가울 것 같다. 정말이지 이창동 감독과 열연한 배우들 그리고 스텝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영화 <밀양>은 하나님(절대자)과의 관계만 강조하는 그러한 관념적 종교 신앙(혹은 이런 유형의 모든 아편적 치유들)의 맹점을 지적하며, 진정한 하늘의 신과의 관계는 질퍽한 고통이 난무하는 땅의 현실을 붙박이로 사는 우리네 이웃과의 관계마저도 함께 내포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땅을 딛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온전한 치유가 가능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고통의 현실에 늘 함께 곁에 있어주는 것, 그것이 곧 숨어 있는 따스한 햇볕 한 줌, 밀양이 아니겠는가!
[영화평론] 보이지 않는 태양, 당신은 누구시기에 |
이창동 감독의 새 영화 <밀양>…삶에 대한 깊고 진지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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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의 영어 제목은 'Secret Sunshine'이다. '보이지 않는 빛'이란 누구일까.(사진제공 파인하우스필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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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이야기>에서 착상한 영화 <밀양>은 영화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빼어나게 보여준다. 남편을 잃은 미망인 신애(전도연)가 밀양으로 이주하는 것은, 결코 그녀의 말대로 ‘남편 살아생전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녀는 밀양(密陽),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빛’에 운명적으로 이끌려갔을 뿐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쩌다가 그 볼 수 없는 빛에 이끌리게 되었을까?
남편의 죽음과 밀양으로의 이주라는 영화의 발단은 죽은 남편의 꿈을 살아남은 아내가 이룬다는 의미에서 매우 전형적인 멜로영화의 이야기 도입 방식 같아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처음부터 놓치게 되고 말 것이다. 애당초 남편의 죽음과 함께 그의 외도행각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그녀가 구축했던 ‘단란한 가정 속 행복한 30대 주부’라는 환상은 무너졌다. 그러나 아직 다 무너진 것은 아니다. 그녀가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이주하는 이유는 이미 균열된 환상을 봉합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속사정을 모르는 낯선 장소에서, 죽은 남편을 열렬히 사랑하는 아내로 남편의 분신과 같은 어린 아들과 함께 성실하게 살아가는 미망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내면 깊은 곳에서 남편의 죽음을 부인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남편의 죽음과 함께 드러난 견딜 수 없이 참혹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의 밀양에서의 삶은 기워 맞춘 환상의 삶이 될 것이었다. 그 환상은 기워진 것이기에, 예기치 않은 순간에 그것이 가리고 있는 참혹한 현실을 불쑥불쑥 드러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를 그림자처럼 지키는 종찬(송강호)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밀양이라고 뭐 다르겠어요? 사람 사는 데가 다 그렇지요.” 영화에서 종찬의 역할은 텍스트적으로 매우 기능적이다. 다시 말해 종찬이라는 존재는 영화 속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보다는 영화의 이야기가 관객에게 의미하는 방식을 매개하는 과정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그의 시선은 신애의 특별한 인생을 일반화하는 독특한 프리즘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를 통해 신애의 인생 역정은 기구한 여성의 별다른 그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공간을 공유하는 모든 존재의 그것이 된다. 그는 아마도 단편 <벌레이야기>의 화자, 곧 이청준의 단편소설 속 주인공 여성의 남편이 변신한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청준의 화자와 이창동의 종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청준의 화자는 주인공의 남편이면서도 모든 정보를 종합하는 객관적 시점을 견지하는 비인간적 존재인 반면, 이창동의 카센터 주인 종찬은 영화적 현실 속의 한 인물, 곧 결코 정보를 종합하지도, 신애의 속내를 들여다보거나 주변 인물들의 됨됨이를 평가하지도 못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와 같은 소설 속 인물의 영화적 변신은 영화가 결코 소설이 말하는 바를 그대로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렇다면 종찬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편화한 신애의 특별한 삶의 내용은 무엇일까? 우리는 영화 주인공 신애가 겪는 지독한 비극을 통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을까?
신학적 문제에 빠져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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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애가 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온다. (사진제공 파인하우스필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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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애가 밀양에서 다시 시작하는 삶은 순조롭게 전개되는 듯이 보인다. 터줏대감 같은 종찬의 도움으로 피아노 학원도 열고 집도 장만하며 이웃과 관계도 터나간다. 그녀는 결코 자신의 비극을 감추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은밀히 흘린다. 자신의 비극적 과거에 대한 이웃들의 인지는 그녀가 새로 구성하는 환상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웃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구성하는 것이다. ‘죽은 남편을 못 잊어 그의 고향으로 내려온 미망인’이라는 환상의 무대 위에서 그녀는 과거에 남편에게 사랑을 받았고, 지금은 이웃에게 동정과 존경을 받는 존재다. 그녀는 또한 은근히 재산을 과시하기도 한다. 환상의 주체는 언제나 세계의 주인공이자 그 세계를 통제하는 자다. 그녀는 그녀의 환상 속에서 행복하다. 그녀가 독실한 그리스도 교인인 약국집 부부의 열성적인 전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도 그녀가 행복했기 때문이다. 약국집 부인의 “당신같이 불행한 사람은 주님을 영접해야…”라는 말에, 그녀가 신경증적으로 반응하는 이유는 이런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진실과 대면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환상을 구축하는 그녀의 노력이 다시 참혹한 진실을 불러들인다. 그녀에게 참혹한 진실을 일깨우는 존재는 역설적으로 그녀가 구축한 환상에 말려든 자다. 그녀를 돈 많은 미망인이라고 오인한 주변인 가운데 하나가 그녀의 아들을 유괴하여 살해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부분에서부터 급격히 신학적인 문제에 빠져든다. 이른바 신정론(神政論)의 문제다. 신이 존재한다면 왜 이 세상에 이유 없는 가혹한 비극이 발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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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의 죽음으로 신에게 의지하게 되는 신애. 사진은 신애가 아들이 유괴된 사실을 알고 괴로워 하는 모습. (사진제공 파인하우스필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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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의 죽음은 그녀가 더 이상 자신만의 능력으로 환상을 구성할 수 없는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모든 이유를 만족스럽게 해명해준다고 간주한 존재, 곧 신에게 의지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불행은 ‘은혜를 드러내시려는 주님의 섭리’ 속에서 단순한 의미 이상의 어떤 것이 된다. 갑자기 열성적인 신자가 된 그녀는 남편과 자식을 대체한 ‘주의 섭리’와 함께 가장 숭고한 주체로 거듭나는 환상을 구성한다. 그리고 자신의 환상을 확고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마지막 내기를 건다. 전적으로 사랑하시는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끔찍하게 살해한 자를 용서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의 용서는 결코 내면에만 머물 수 없는데, 환상은 언제나 그것을 증명해줄 타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환상은 사회적으로만 구성될 수 있으며, 사회적일 때에만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그녀의 용서에는 그녀의 용서를 증명할 일종의 의식이 필요하다. 그녀의 용서는 교도소로 살인범을 직접 찾아가 타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와 대면하면서 치러져야 하는 하나의 의식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의식은 실패로 돌아간다. 용서할 대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교도소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귀의한 살인범은 이미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주인공들을 통해 본 내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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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애는 아이가 유괴된 후 종찬의 가게로 가지만 결국 아무도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진제공 파인하우스필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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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대목에서 소설과 영화는 그녀의 절규를 공유하고 있다.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보다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럴 권한은 주님에게도 없어요.” 하지만 그 의미는 각각 전혀 다른 방향으로 분기한다. 소설은 그리스도교의 값싼 용서를 비판하는 데 반해, 영화는 그녀의 절규를 문장 자체의 의미를 갖는 발언이 아니라 일종의 신음이나 비명과 같은 어떤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참혹한 진실 앞에서 자신이 구축한 초라하고 빈곤한 환상이 여지없이 파괴되는 것을 온몸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신음이다. 역설적으로 그녀는 이 순간부터 신의 존재를 뚜렷이 느낀다. 그녀의 하느님은 환상 속에 안주하려는 그녀의 모든 퇴행적인 시도를 철저하고도 끔찍한 방식으로 방해하고 차단하며 무너뜨린다. 여기에서 신은 라캉의 실재처럼 ‘목 안의 가시’와 같은 존재다. 인간이 구축하는 낙원의 환상, 그 환상 속에 신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오직 그것의 실패를 통해서만 그 존재가 인지되는 낯선 자 말이다. 그의 형상은 그의 형상을 주조하려는 인간의 시도가 실패하는 지점에서 찰나적으로 감지될 뿐이다. 그는 밀양이다. 보이지 않으나 태양과 같이 압도적으로 존재한다.
그녀는 신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복수하려 한다. 그러나 소설과 달리 영화 속의 그녀는 어렴풋이나마 배신한 자는 그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그녀의 복수가 서슬이 퍼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기력하고 심지어는 희극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녀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며, 따라서 절망적으로 저항할 뿐이다. 소설에서 여주인공의 자살 시도가 철저한 절망의 표현으로서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반면, 영화에서 그녀의 자살 시도는 상징적이다. 그녀는 다시 살기 위해 죽어야 했다.
자살 시도로 인한 상처를 회복하고 돌아온 날 그녀는 미장원에 들른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를 잘라줄 미용사는 다름 아닌 살인자의 딸이었다. 그녀는 신이 그녀를 끝까지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머리를 자르던 그녀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마당에서 스스로 가위를 들고 제 머리를 자른다. 그녀의 하느님이 끝까지 방해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모습을 타자의 욕망에 맡기는 주체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그녀의 진실에 터하여 스스로 구성해야 한다.
신애가 종찬에게 거울을 맡기고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장면은 ‘미장아빔’(mise en abyme), 곧 영화가 말하는 모든 의미가 누적되어 있는 요약적 장면이다. 그녀는 이제 ‘전혀 그녀의 타입이 아니’었던 종찬에게 거울을 들게 하고 자신을 본다. 그녀의 삶은 이제 폐쇄적인 환상 밖으로 열려졌다. 그녀는 환상을 가로지른 것이다. 이때 환상을 가로지른 그녀의 의지는 그녀를 밀양으로 이끈 운명, 혹은 미지의 힘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전적인 자유가 바로 절대적인 존재에의 복종이 되는 자유의지라는 신학적 개념이 하나의 장면에서 탁월하게 형상화한다.
한편 관객은 종찬이 든 거울을 통해 그녀를 본다. 그녀는 관객의 거울 이미지가 된다. 물론 영화는 관객과 신애 사이의 상상적이며 자기애적인 관계를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행복한 관객들은 종찬이 든 거울을 통해 자신의 비극적인 진실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누더기 같은 환상 안에서 실제로는 얼마나 비루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지를. 종찬은 프리즘 같은 존재다. 종찬과 신애에게서 우리 자신을 본다.
영화는 새파란 창공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해서 마당에 고인 지저분한 개숫물을 포착하며 끝난다. 추상적이며 신앙적인 하늘에서 시작하여 구체적이며 신 없는 현실로 돌아온 걸까? 그렇지 않다. 개숫물이 반짝이는 건 바로 태양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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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애가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종찬도 함께 교회를 가게 된다. 사진은 주일에 교회 주차 봉사를 하고 있는 종찬의 모습. (사진제공 파인하우스필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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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는 놀라운 모험이다. 감독은 흥행 코드를 철저하게 삭제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인이다. 그는 관객의 궁극적 관심은 영화적 쾌락이 아니라 인간과 삶 그 자체에 대한 깊고 진지한 탐구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인지 아니면 ‘그렇기 때문’인지, 영화는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이 영화는 하나의 모험영화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이더스: 잃어버린 성궤의 추적자들>를 빗대서 ‘부인된 인간과 삶의 진실의 추적자들’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그만큼 영화는 상영시간 내내 매혹적인 긴장을 유지한다. 영화의 산업적 정체를 실현하기 위해, 그러니까 영화가 오직 돈 되는 방식만을 생각하는 것이 지각 있는 태도가 된 현실에서, 영화가 가장 중요한 주체인 관객에게 무엇이어야 하며, 이를 어떻게 호소할 수 있는가를 용감하게 시도한 감독에게 경의를 표한다. 더욱이 오직 세계의 표면에만 시선을 붙박아두는 세태 속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 성찰은 참으로 귀하고도 귀하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교리가 그 정체를 규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은 오직 스스로 말씀하신다. 교회를 포함한 인간의 신학적 노력은 스스로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귀 기울이는 방식을 제안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이 영화처럼 동시대의 선입견에 의해 가려진 진실, 그것을 부인하는 태도가 인간의 삶에 치명적인 증상으로 귀환하는 방식을 탐색하는 것이다.
사족이지만 이 영화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민감한 문제인 그리스도교 재현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자. 영화는 어떻게 이렇게 냉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가 경악스러울 만치 사실적이다. 영화 속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애와 하느님 사이를 매개하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신애와 마찬가지로 미망 속의 군상들이다. 그러나 영화는 결코 그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영화는 단지 그들을 그들의 진실에 충실한 자로 그릴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정도로만 그려졌다는 게 못마땅할 수 있겠지만, 누구나 객관적 시선에 드러나면 어딘지 어색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최소한의 양식만 있어도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상상적으로 오해하는 한계 속의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는 자인(自認)이라는 경로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돌파할 수 없을 것이다. 정혁현/ 목사·영상문화연구소 케노시스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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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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